EP005. 너 눈, 나 손.
▣ 늘해고 보건실 재검진 기록 이름: 도이찬(2-3) 키: 158.2cm(4월 2일) → 166.9cm(4월 30일) 몸무게: 47kg → 58kg 특이사항: 4/13 붕괴 사고 후 입원 10일
"다시 한 번만 서 볼래?"
4월 30일 금요일 아침, 본관 1층 보건실에서 보건 선생님이 키 재는 기계의 막대를 다시 내렸다. 막대가 이찬의 정수리에 툭 닿았다.
"166.9. 똑같네."
선생님은 기록지를 들여다보다가 이찬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기록지로 눈을 내렸다.
"한 달 만에 8센티미터……. 아니, 사고 난 날부터 치면 17일이지."
"좀 많이 컸죠."
"좀이 아니라."
선생님이 볼펜 끝으로 두드린 몸무게 칸에는 11킬로그램이 늘어난 숫자가 적혀 있었다.
"요즘 하루에 몇 끼 먹어?"
"세 끼요. 근데 한 끼가 좀 커요."
‘사흘 전 저녁은 다섯 공기였지.’
【애송이, 인간 의원이 너를 의심한다.】
‘의심 아니야. 걱정하는 거야.’
【인간들은 걱정과 의심을 같은 얼굴로 한다.】
선생님은 특이사항 칸에 무언가를 더 적었는데, 이찬은 그 글씨를 끝내 읽어 내지 못했다.
"성장판 검사 한번 받아 봐.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네."
꾸벅 인사하고 보건실을 나오는데, 복도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열흘 전보다 턱이 조금 길어져 있었다.
1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 별관 2층 임시 교실에서 이찬이 자리에 앉자 앞자리 의자가 빙글 돌아갔다.
끼익.
"야, 도이찬."
민도겸이었다. 육상부에, 왼 손목에 낡은 손목밴드를 늘 차고 다니는 애였다. 1학년 때부터 두 해째 같은 반이었지만 이찬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 뭐 먹었냐."
"……밥."
"밥 먹고 그렇게 커? 나도 밥 먹는데."
민도겸은 웃으면서 이찬의 다리를 훑고, 책상 밑으로 삐져나온 발목까지 보더니 또 웃었다.
"실화냐. 너 원래 내 가슴께였잖아. 이제 턱까지 오네."
이찬은 대답을 고르느라 잠깐 머뭇거렸다. 설마 요괴가 들어와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원 밥이 잘 맞았나 봐."
"레전드."
민도겸은 그 말만 남기고 의자를 다시 돌리더니 앞자리 애들에게 뭔가를 떠들기 시작했다. 이찬은 그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곽태진이 빵 봉지를 던질 때마다 민도겸은 늘 교실 반대편에 있었다. 웃지도 말리지도 않고, 그냥 구경만 하던 애였다.
‘그러니까 지금 말 건 거, 처음이네.’
그게 반가운 일인지 아닌지, 이찬으로서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 1층 매점이었다.
도시락 두 개를 먹고 왔는데도 배가 고파서, 이찬은 빵 대신 삼각김밥 세 개를 집었다. 계산대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 계좌 잔액을 확인했다. 어차피 결과는 뻔했지만.
‘이번 달 용돈, 벌써 반.’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매점 입구를 곽태진이 막고 있었다. 양옆에는 최민규와 장도현이 따라붙어 있었고, 곽태진의 오른팔에는 아직 깁스가 감겨 있었다.
이찬을 보자마자 최민규가 입을 열었다.
"야, 도이찬. 빵—"
탁.
곽태진이 깁스 안 한 왼팔 팔꿈치로 최민규의 옆구리를 치자, 최민규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켰다.
곽태진은 이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복도로 나갔다. 최민규와 장도현이 그 뒤를 따랐는데, 장도현만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곽태진이 빵 없이 매점을 나갔어. 6개월 만에.’
봉지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이긴 기분은 아니었다. 그냥 이상할 뿐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첫 번째 삼각김밥을 집어 드니 포장지 위에 숫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1, 2, 3.
【그것은 무엇이냐.】
‘삼각김밥.’
【그 위의 숫자는.】
‘뜯는 순서.’
【……순서대로 뜯어야 하는 것이냐.】
‘안 그러면 김이 찢어져.’
천곡이 조용해진 사이, 이찬은 1번을 당겨 가운데 비닐을 벗기고 2번, 3번을 차례로 뜯었다. 김이 밥을 감싼 채 고스란히 손에 남았다.
【……1500년 봉인보다 어렵구나.】
‘이게?’
【봉인은 순서가 하나다. 이것은 셋이다.】
천오백 년을 살았다는 녀석이 삼각김밥 포장지 앞에서 쩔쩔매다니, 여기서 웃음을 참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이찬은 삼각김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맞은편 테이블의 1학년이 이상한 눈으로 이찬을 힐끔거렸다.
세 개를 다 먹고 나서야 배 속이 조금 조용해졌다.
점심시간이 끝나 갈 무렵, 이찬은 본관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옥상 문은 원래 잠겨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진 뒤로 자물쇠가 헐거워졌으니, 이제는 살짝 밀기만 해도 열리는 셈이다. 이찬이 난간에서 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서자, 운동장에서 트랙을 도는 육상부가 내려다보였다.
트랙 맨 앞에서 달리는 애가 민도겸이었다. 왼 손목의 밴드가 이 높이에서도 눈에 띄었고, 민도겸은 바퀴를 돌 때마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찬은 운동장에서 눈을 돌렸다.
"해 보자. 계약서 2조."
【무엇을.】
"창문 그거. 이번엔 일부러."
【그날은 우연이었다. 우연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연습하자는 거잖아."
천곡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누가 들어도 마지못해 하는 숨이었다.
【공간에도 결이 있다. 나무에 결이 있듯이. 나는 그 결을 본다. 너는 손으로 그 결을 따라 선을 그어라.】
"결이 어딨는데."
【네 앞, 한 뼘. 손목 높이. 비스듬히.】
이찬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편 다음, 눈앞의 허공에 비스듬히 선을 그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빗나갔다. 손톱 하나만큼 위다.】
다시 그었더니 이번엔 손바닥이 찌릿했지만, 그게 다였다.
【너무 빠르다.】
또 그었을 때는 너무 느렸다. 네 번째에는 손가락 끝이 저려 왔고, 다섯 번째에는 손목까지 저릿저릿했다.
‘창문 열두 장은 그냥 됐는데.’
【그날 너는 화가 나 있었다.】
‘지금은 안 났어.’
【그래서 안 되는 것이다. 화로 접은 것은 남는 게 없다. 손으로 접어야 남는다.】
이찬은 저린 손을 털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그러다 옥상 구석 환기구 옆에서 흰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실내화 한 짝이었고, 뒤꿈치에 매직으로 쓴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도이.
‘……저거 내 거네.’
다섯 달 전에 없어진 실내화였다. 최민규가 웃으면서 본관 바깥 비상계단 꼭대기에서 옥상으로 던졌다고 했는데, 그때는 옥상 문이 잠겨 있어서 찾으러 올라올 수조차 없었다.
이찬이 일어나 실내화 쪽으로 걸어가는데 바람이 불었다.
후웅.
실내화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난간 쪽으로 가더니, 난간 아래 틈을 빠져나가 옥상 끝으로 미끄러졌다. 그 아래는 운동장까지 4층 높이였다.
【왼쪽, 한 팔. 아래로 비스듬히. 지금.】
생각할 틈도 없이 이찬은 손바닥을 그었다.
실내화와 이찬의 손바닥 사이에 있던 거리가 접혔다. 그리고 옥상 끝에서 떨어지던 실내화가, 다음 순간 이찬의 손바닥 위에 얹혀 있었다.
툭.
손 위의 실내화에는 옥상 바닥을 구르며 묻은 먼지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됐다.’
【됐다.】
천곡과 이찬이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이찬이 고개를 들자 천곡이 먼저 덧붙였다.
【접은 것은 네 손이다. 결을 본 것은 나다. 잊지 마라.】
"응. 너 눈, 나 손."
먼지를 털고 한쪽 발을 넣어 봤지만, 발가락만 들어가고 뒤꿈치가 턱 걸렸다. 다섯 달 사이에 발도 그만큼 커진 것이다.
‘찾았는데 못 신네.’
【버려라.】
‘안 버려. 내 거야.’
이찬은 실내화를 가방 옆 주머니에 꽂았다. 어렵게 찾은 걸 또다시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손바닥이 뜨거웠고, 이번에는 배까지 고팠다. 삼각김밥 세 개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종례 시간, 별관 2층 임시 교실에서 담임이 가정통신문을 나눠 주었고 종이가 맨 뒷자리까지 넘어왔다.
▣ 가정통신문 — 지진 피해 학교 특수 환경 검진 안내 대상: 늘해고 전교생 일시: 5월 3일(월) 1교시부터, 체육관 내용: 붕괴 현장 인근 환경 노출 검진(간단한 측정기 사용, 1인 1분) 비고: 이상 소견이 나오면 정밀 검사 기관으로 이송합니다
교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스 검사 같은 거래."
"월요일 1교시면 개이득 아님? 수업 빠지고."
"이송은 뭐야, 무섭게."
그때 이찬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반 단톡이었다.
[3반 단톡] 측정기 뭐임 석면 그런 거?
[3반 단톡] 우리 반은 3층에 있었으니까 더 하겠네
[3반 단톡] 도이찬 걸리는 거 아님 ㅋㅋ
이찬의 손가락이 마지막 줄에서 딱 멎었다. 끝에 붙은 ㅋㅋ 두 글자가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천곡은 이찬의 눈을 빌려 가정통신문을 줄줄이 읽어 내려갔고, 이찬이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을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하굣길, 시장 쪽으로 내려가는 언덕에서는 저녁 해가 상가 간판 위로 기울고 있었다.
【애송이.】
천곡이 먼저 이찬을 불렀는데,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아까 그 종이. 측정기라 했다.】
"응. 가스 같은 거 재는 거래."
【아니다. 저건 요기를 재는 것이다.】
이찬은 걸음을 멈췄다.
"요기?"
【요괴의 기운. 내가 네 몸 안에 있다. 재면 나온다.】
"……나오면?"
【걸리면 너는 끌려간다.】
이찬이 가방끈을 꽉 쥐자, 가방에 달린 키링이 흔들렸다. 철벽 님 카드로 만든 바로 그 키링이었다.
"누가 데려가는데. 이송한다는 데가 어딘데."
【모른다. 다만 안다. 1500년 전에도 인간들은 그랬다. 요괴가 든 몸은 그냥 두지 않는다. 대요괴를 품은 몸이라면 더더욱.】
"대요괴?"
천곡은 그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짧게 덧붙이기만 했다.
【숨겨야 한다.】
"어떻게."
【생각 중이다.】
이찬은 언덕 아래를 굽어보았다. 시장 골목 끝에서 「선영네」 간판 불이 막 켜지고 있었다. 아마 엄마는 지금쯤 저 안에서 저녁 장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이찬은 휴대폰 달력을 열었다. 4월 30일 금요일. 5월 1일, 2일, 그리고 3일 월요일.
손가락을 접어 가며 하나씩 셌다.
"D-3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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