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1. 라벨
해주가 만든 옷에는 해주의 이름이 없었다.
8년 동안 그랬다. 서진패션 여성복 브랜드 '루다'의 선임 디자이너 윤해주, 서른한 살. 해주가 그린 원피스는 매장에 걸리는 순간부터 '루다' 두 글자로만 팔렸고, 그렇게 버틴 끝에 맞은 올봄 해주는 감원 명단 맨 위에 올라 있다.
오늘 밤, 해주는 처음으로 자기 이름 라벨을 박다가 1980년 4월의 명동에 떨어진다.
돈도, 아는 사람도, 돌아갈 방법도 없는 계엄의 봄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목에 건 회사 줄자 하나와 46년 치 유행의 기억뿐이니, 빈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 봄, 해주를 다락에 숨겨 주는 사람은 스물세 살 먹은 양장점 시다다. 색도 모르고 혼나기 바쁜 풋내기다.
해주는 그 친구의 이름으로 가게를 열고 그 친구의 이름으로 옷을 판다. 이번에도 해주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그 친구의 이름이 무엇이 되는지 알게 되는 날까지는.
2026년 4월 2일 목요일 오후, 성수동 서진패션 사옥 6층 디자인팀.
올봄 일곱 명이던 팀이 세 명으로 줄었고, 빈자리 넷은 AI 프로그램 하나가 채웠다. 사람 넷이 하던 일을 프로그램 하나가 해낸다니, 위에서 보기엔 남는 장사였을 거다.
해주의 책상에는 모니터가 두 대였는데, 왼쪽 화면에는 해주가 사흘 걸려 그린 셔츠 원피스 한 벌이, 오른쪽 화면에는 AI가 오전에 뽑아낸 시안 40벌이 줄지어 떠 있었다.
▣ 루다 26FW 시안 검토 — 윤해주 1안 셔츠 원피스: 반려 사유: 감도 부족, 트렌드 반영 미흡 대안: AI 시안 17번으로 진행
모니터 구석에서 사내 메신저 창이 깜빡였고, 보낸 사람은 실장이었다.
[마혜령] 윤해주 시안 다시.
[마혜령] 이거 누가 사?
[마혜령] 17번으로 가.
'누가 사긴. 작년에 리오더 두 번 걸린 라인인데.'
해주는 답장을 쓰는 대신 목에 건 줄자를 만지작거렸다. 입사 이듬해 회사 기념품으로 받은 줄자였는데, 로고 SEOJIN의 가운데 O가 닳아서 이제는 SE JIN처럼 보였다.
17번 시안을 열어 보니 소매가 몸판보다 길었다.
'팔 들면 배꼽 나온다. 3분 만에 그렸으니까.'
점심 직후 샘플 품평 때도 다르지 않았다. 실장은 해주의 셔츠 원피스를 손끝 두 개로만 집어 들더니 원가부터 물었다.
"단가."
"원가 2만 3천이요."
"AI 거는 1만 8천."
"숫자로 말해."
해주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숫자로 말하기 시작하면 해주가 지는 싸움이었다.
'소매가 틀린 건 숫자가 아니라서.'
오후 네 시, 실장 마혜령이 펜 뚜껑을 이로 문 채 해주 자리 옆에 와 섰다.
"감이 늙었어."
"……네, 수정할게요."
"수정 말고. 지하 아카이브실 정리. 오늘부터 윤해주가 해."
"그건 총무팀 일 아닌가요?"
"위에서 내려온 거야. 토 달지 마."
맞은편 자리의 진다온이 의자를 빙글 돌리더니, 눈치를 살피다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실장님, 내일 회식 밀면 어때요? 성수에 새로 생겼대요."
"밀면은 부산 가서 먹어."
"네?"
"나 부산 사람이야."
실장이 자기 열쇠고리에서 열쇠 하나를 빼내자, 고리 끝에 매달린 손바닥만 한 헝겊 주머니가 흔들렸다. 무늬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랜 천이었다.
'부적인가. 실장님이랑 제일 안 어울리는 물건.'
열쇠가 책상 위로 날아오고, 뒤이어 면장갑 한 켤레가 툭 떨어졌다.
"먼지 많아. 손 버리지 마."
'손 버릴 일 없게 일을 주시든가.'
실장은 돌아서면서 검정 카디건 소매 끝을 손가락에 돌돌 말았는데, 해주 자리 옆을 지날 때만 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그사이 사내 메신저 알림이 연달아 떴다. 맞은편의 다온이 모니터 너머로 눈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진다온] 선배 지하 아카이브요?? 회장님 물건 있는 데?
[진다온] 회장님 얼굴 아는 사람 우리 회사에 없대요
[진다온] 오래된 회사라 그런가 ㅋㅋ
오래된 회사. 사실 해주가 아는 것도 그 정도가 전부였다. 회장 이름은 공서진이고, 사내 행사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위. 아무도 얼굴을 모르는 위.'
다음 달이 인사평가였는데, 아카이브실 정리는 평가표 어디에도 칸이 없는 일이었다. 하필 이 시기에 그 일을 맡긴 이유야 뻔했으니, 굳이 따져 물을 것도 없었다. 나가기 전에 창고 정리나 해 놓고 나가라는 말이다.
'잘리기 전에, 내 이름 붙은 거 하나만.'
저녁 일곱 시, 지하 2층 아카이브실은 형광등이 한 줄만 들어와 어둑했다. 철문에 붙은 누렇게 바랜 종이부터 눈에 들어왔다.
「회장실 물품 — 무단 반출 금지」
행거마다 비닐을 씌운 옷이 빽빽했고, 그 사이사이로 오래된 견본과 낡은 패턴 상자, 나무 재단자가 끼어 있었다. 해주는 면장갑을 끼고 상자 목록을 하나씩 적어 나갔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떨렸다. 먼저 퇴근한 다온이었다.
[진다온] 선배 아카이브 혼자 해요?? 도와드려요?
[진다온] 아 저 오늘 칼퇴구나 ㅋㅋ 죄송
해주는 엄지 이모티콘 하나로 답을 대신하고 다시 목록으로 돌아갔는데, 그게 길어지는 사이 시계는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 아카이브실 정리 목록 — 윤해주 행거 A: 견본 재킷 23벌(라벨 없음) 행거 B: 원피스 31벌(라벨 없음) 상자 1~12: 종이 패턴(연도 표시 없음) 기타: 나무 재단자 1
견본 어디에도 라벨이 없었다. 브랜드도, 만든 사람 이름도 없는 옷들이었다.
'회장님 옷도 무명이네. 동지다.'
구석에 보자기를 덮어씌운 덩어리가 하나 있어서 걷어 보니 발틀 재봉틀이었다. 몸체의 금색 글씨는 반쯤 벗겨졌는데도 철판 상표만큼은 또렷했다.
「은하 미싱」
원주 동네 수선집, 엄마 가게에 있던 것과 같은 발틀이었다. 해주는 그 재봉틀 밑에서 실패를 굴리며 컸다.
벨트가 바퀴에서 빠진 걸 보고 해주는 장갑을 벗어 벨트를 바퀴 홈에 걸었고, 서랍을 뒤져 찾아낸 굳은 기름병으로 북집에 두 방울을 떨어뜨렸다.
발판을 밟자 바퀴가 거꾸로 돌면서 실이 끊어졌다.
두 번째. 바늘이 두 땀을 건너뛰었다.
세 번째. 발목에서 힘을 빼고 바퀴가 박자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드르르륵.
바퀴가 앞으로 돌기 시작하더니 자투리 천 위로 고른 땀이 한 줄 생겼다. 해주는 휴대폰으로 10초를 찍어 다온에게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진다온] 헐 이게 돌아가요??
[진다온] 선배 손은 진짜…
[진다온] 근데 선배 아직 회사예요?? 얼른 퇴근해요ㅠ
해주는 답장을 쓰다 지웠다. 그러다 서랍 안쪽에서 굴러다니는 흰 면테이프 한 롤이 눈에 걸렸다.
테이프를 손바닥 길이만큼 잘라 낸 해주는 볼펜으로 또박또박 이름을 적었다.
「윤해주」
'8년 동안 남의 이름만 박았는데.'
테이프 양 끝을 접어 노루발 밑에 넣고 발판을 천천히 밟자, 한 변을 지나 모서리를 돌고 다시 다음 변으로, 땀이 이름을 둘러 나갔다.

마지막 한 땀이 남았을 때, 해주는 발판에 체중을 실었다.
바늘이 테이프 끝을 뚫고, 그 밑의 자투리 천을 뚫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드르르르르륵.
바퀴는 돌고 발판도 움직이는데 소리만 이상하게 길어졌다. 한 대가 내던 소리 위로 다른 재봉틀 소리가 겹쳐 들어오더니, 둘이 셋이 되면서 박자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형광등이 두 번 깜빡이는가 싶더니 하얀 불빛이 누렇게 물들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지하인데도 행거의 비닐들이 일제히 바스락거렸다.
발을 떼려 했지만 발판이 해주의 발을 실은 채 계속 오르내렸다. 손끝이 저려 오는 사이, 엄지와 검지 사이로 면테이프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귓가에서 실 풀리는 소리가 났다. 실패에서 실이 끝도 없이 풀려 나가는 소리였고, 8년 동안 남의 이름을 박은 옷들이 그 실 끝에 딸려 멀어져 갔다.
탁.
형광등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겹쳐 울리던 재봉틀 소리가 한꺼번에 멎었다.
어둠이었다.
제일 먼저 달라진 건 바닥이었다. 운동화 밑창 아래에서 나무 마루가 삐걱였고, 지하의 찬 콘크리트 기운 대신 무겁고 따뜻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멀리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와 경적 한 번,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까지, 어느 것 하나 성수동의 밤 소리가 아니었다.
발밑의 발판도 가벼웠다. 방금까지 밟던 무쇠 발판보다 칠이 훨씬 매끈했다.
해주는 손을 더듬었지만 테이프는 손안에도, 바늘 밑에도 없었다. 손끝에 남은 건 새 기계 기름의 미끈함뿐이었다.
휴대폰 불빛을 켜자 낮은 천장이 드러났다. 비스듬한 지붕 밑으로 발틀 재봉틀 세 대가 나란히 줄을 맞추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기계의 철판 상표에 불빛을 대 보니,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은하가 아니다.'
해주는 의자에 앉아 발판을 밟았고, 바늘은 빈 노루발 위에서 오르내렸다.
드르륵.
그래도 아카이브실의 형광등은 돌아오지 않았고, 어둠은 그대로였다.
더 세게 밟아 봤지만 바퀴만 헛돌았다.
재단대 위에 원단 두루마리가 쌓여 있었는데, 그보다 먼저 휴대폰 화면 위쪽 글자가 눈에 걸렸다.
「4월 2일 (목) 오후 10:41 · 서비스 안 됨 · 23%」
지하 2층에는 창이 없었다. 그런데 이 방에는 비스듬한 지붕 밑으로 작은 창이 하나 나 있었다.
해주는 다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걸었다.
「통화 실패 — 네트워크 없음」
재단대 끝에는 일본어 잡지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모델의 어깨가 각지게 솟아 있는데 종이는 누렇기는커녕 빳빳했고, 오래된 잡지라면 이렇게 빳빳할 수가 없는 법이다.
아래층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모레 민 여사님 가봉이오. 마이부터 다려 두시오."
"네, 원장님."
'마이. 엄마 가게 단골 할머니들 말인데.'
"공 양, 불 끄고 가시오."
"네, 원장님."
대답하는 목소리가 젊었다. 해주는 숨을 죽였다.
그 와중에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재단대 위 원단 끝을 엄지와 검지로 비비자, 빽빽하고 묵직한 결이 손끝에 감겨 왔다.
'울이다. 함량 높은 울. 요즘 이렇게 짜는 데 없는데.'
아래층 불빛이 하나씩 꺼지면서 계단 틈으로 새던 누런 빛도 점점 가늘어졌다.
해주는 창가로 가서 먼지 낀 유리를 소매로 쓱 닦았다.
가로등 아래 맞은편 건물 2층 창에 페인트 글씨가 세로로 쓰여 있었다.
「洋裝」
고개를 숙이자 바로 아래 간판 끝이 보였다. 흰 바탕에 붉은 글씨였다.
「라 레느 — 맞춤 양장」
맞은편 1층 쇼윈도의 마네킹은 꽃무늬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칼라가 손바닥만큼 넓었고 허리는 가는 벨트로 조여 놓았다.
해주의 눈이 저절로 치수를 쟀다.
'칼라 9센티. 복고 콘셉트치고 너무 진지하다.'
게다가 거리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둥근 코의 버스 한 대가 털털거리며 지나가자 창유리가 덩달아 떨렸다.
전봇대에 붙은 벽보는 가로등 빛에 굵은 글씨만 겨우 읽혔다.
「밤길 조심 — 자정 전에 귀가합시다」
'자정 전에? 성수동은 자정부터 시작인데.'
양복 차림 남자 둘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뛰어갔고, 길 끝 상점들은 하나둘 덧문을 내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거리를 다시 훑어봐도 휴대폰을 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광판도, 편의점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해주는 창틀을 붙잡았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오늘 4월 이일……. 지하 창고 정리하다가……."
제 목소리인데도 귀에 낯설어서, 해주는 같은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4월 이일. 지하 창고. 재봉틀……."
끼익.
아래에서 계단이 한 번 울었다. 해주가 숨을 멈춘 채 창틀을 움켜쥐는 바람에 페인트 껍질이 손바닥에 박혔다.
'꿈이면 깨. 지금 깨.'
삐걱 소리는 다시 나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 숨을 고르는 기척이 계단참에 머물렀다.
해주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눈이 맞은편 「洋裝」 글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수동 지하 2층이었다.
덜컥.
다락 문고리가 돌아가면서 문틈으로 누런 빛이 새어 들었다.
문이 열리자 손전등 불빛이 해주의 운동화부터 타고 올라왔다. 검정 셔츠, 목에 건 줄자, 그리고 얼굴.
불빛 뒤에는 양팔에 꽃무늬 토시를 낀, 스물 남짓한 처녀 하나가 있었다.
해주가 손바닥으로 불빛을 가리자 처녀가 반걸음 물러서며 문틀을 꽉 잡았고, 불빛이 해주의 손등 위에서 바르르 떨렸다.
둘은 한참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처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언니 누구유?"
해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전등 불빛이 흔들리며 벽 한쪽을 훑고 지나갔다.
벽에 걸린 것은 한 장짜리 큰 달력이었고, 맨 위 숫자가 불빛 속에 또렷했다.
「1980年 4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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