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부엌방
"언니 누구유?"
손전등 불빛이 다시 해주의 얼굴로 돌아왔다. 해주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루다 선임 디자이너. 여기서 그게 무슨 소용.'
달력은 불빛 밖으로 밀려났는데도, 해주의 눈은 아직 그 자리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처녀가 한 걸음 들어오더니 해주의 셔츠와 바지, 운동화를 차례로 훑었다. 목에 건 줄자에서는 눈길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둑은 아니죠?"
"……아니요."
"그럼 어떻게 들어왔어요? 문은 아까 내가 다 잠갔는데."
"……모르겠어요."
"어디서 왔는데요?"
"성수동."
"성수동이요? 거기 공장 동네잖아요. 거기서 여기까지 이 밤에?"
'공장 동네. 46년 뒤엔 카페 동네.'
해주가 더는 대답을 못 하는 사이, 처녀는 아래층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대문 닫히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원장님 가셨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처녀는 입술을 깨물고 해주를 다시 뜯어보더니, 그제야 손전등을 아래로 내렸다.
"따라와요. 소리 내지 말고."
라 레느 뒷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보따리 하나를 옆구리에 낀 처녀가 앞장섰는데, 세 번째 칸에서는 발을 건너뛰었고 해주도 얼결에 따라 건너뛰었다.
'삐걱이는 칸을 안다. 매일 오르내린다는 얘기.'
뒷골목으로 나서자 찬 바람이 훅 들이쳤다. 처녀는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말자예요. 여기 시다."
"……해주예요."
말자는 그 이름을 입속에서 굴려 보는 것 같더니 고개만 끄덕였다.
"언니, 막차 놓치면 큰일 나요."
정류장에는 사람이 셋뿐이었고, 다들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둥근 코의 버스가 털털거리며 들어왔는데, 앞 유리에 노선판이 끼워져 있었다.
「신촌 방면」
문간에 선 여자아이가 차체를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렸다. 해주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빨리 타세요, 막차예요! 오라이!"
말자는 손바닥에 동전을 펼쳐 세더니 두 사람 몫을 냈고, 그러고 나니 손바닥이 텅 비었다. 차내 벽에는 붓글씨 같은 페인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일반 90원」
'버스비 90원. 내 지갑엔 카드 세 장, 동전 넷.'
동전이라도 내밀까 하다가 해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긴 지갑 속 동전에는 2010년대 연도가 찍혀 있으니, 내밀어 봤자 일만 커질 게 뻔했다.
버스가 출발했다.
덜컹.
바퀴가 패인 길을 넘을 때마다 의자가 들썩였다. 창가에 앉은 해주의 눈에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과 바깥 거리가 겹쳐 보였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2026년……. 2026년인데……."
말자는 대꾸 대신 창유리에 이마를 기댔다.
군용 트럭 한 대가 버스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짐칸에 짙은 덮개를 씌운 트럭이었는데, 버스 안 누구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들 못 본 척하는 데는 이골이 난 모양이다.
해주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앞자리 등받이에 붙은 광고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봄 양복지 대매출 — 맞춤 환영」
'맞춤 환영. 기성복 매장이 아니라.'
하숙집은 신촌 골목 끝에 있었다. 녹슨 철 대문에 비뚜름하게 붙은 종이 한 장이 먼저 손님을 맞았다.
「하숙 놓습니다 — 학생 환영」
말자가 대문을 밀었다.
끼익.
말자는 문짝을 받쳐 들어 소리를 줄이고는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본채가 아니라, 부엌 옆에 붙은 작은 문을 열었다.
"여기가 내 방이에요."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방이었다. 누런 장판 위에 이불 한 채, 벽에 걸린 옷 두 벌, 구석에 보따리 하나가 살림의 전부였고, 벽 너머에서는 연탄 아궁이가 낮게 끓었다.
"하숙방은 아니고 부엌방이에요. 한 달에 1만 2천. 대신 아주머니 집안일 거들고 밥 얻어먹어요."
'방세 1만 2천, 내 돈 0원.'
이불을 펴던 말자의 손이 멈칫하더니, 눈길이 해주의 검정 셔츠와 통 넓은 바지에 다시 머물렀다. 눈썹이 모였다가, 이내 풀렸다.
해주는 자기 옷을 내려다보았다. 어깨선이 팔꿈치 근처까지 축 내려온 셔츠였다.
'오버핏. 여기선 그냥 남자 옷이구나.'
사실 이 동네에서 오버핏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사람부터 없을 거다.
"아주머니한테는 내가 말할게요. 내일 아침에."
"……고마워요, 말자 씨. 그런데 왜……."
말자가 손사래를 쳤다.
"그냥요."
말자는 베개를 툭툭 두드려 모양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원장님한테 걸리면 언니도 끝이고 나도 끝이니까. 같이 안 걸리면 되잖아요."
그러고는 이불 한쪽을 들어 해주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때 바깥에서 길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위이이잉.
"열두 시예요. 이제 아무도 못 다녀요."
말자가 돌아눕자, 해주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서비스 안 됨 · 21%」
화면을 끄고 나니 사이렌이 잦아든 자리에 연탄 끓는 소리만 남았다.
새벽녘, 마루에서 우는 소리가 났다.
부엌방 문을 열어 보니 마루 구석에 여섯 살쯤 된 꼬마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노란 원피스 옆구리가 손바닥만큼 터진 채였다.
말자가 먼저 나가 손을 내밀었다.
"혜령아, 할머니 깨기 전에 그거 이리 내."
꼬마는 원피스를 더 꽉 쥐고 해주를 올려다보았는데, 벌린 입에 앞니 두 개가 빠지고 없었다.
"바가지 언니는 왜 머리가 바가지야?"
'도착 하루 만에 별명이 생겼다.'
"……잘랐어."
"왜?"
"편해서."
"왜?"
해주는 대답 대신 바지 주머니를 비워 휴대폰과 지갑을 마루 끝에 내려놓았다. 꼬마가 쪼르르 그 옆으로 와 쪼그려 앉았다.
마루 한쪽에는 보자기를 덮어 놓은 덩어리가 있었다. 해주가 보자기를 걷어 내자, 칠이 벗겨진 발틀 재봉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 그거 아주머니가 아끼는 거예요. 고장 나면 나 쫓겨나요."
그래도 해주는 원피스를 받아 뒤집었다. 시접이라고 해 봤자 손톱 반만큼밖에 안 됐다.
'그냥 박으면 내일 또 터진다. 덧대야 한다.'
해주는 자기 셔츠 안단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잘라 내고, 침으로 세운 실 끝을 바늘에 꿰었다.
발판은 처음 몇 번 반 박자씩 늦게 따라왔다. 어젯밤 지하에서 밟던 것보다 무거웠지만, 세 번째부터 박자가 맞아떨어졌다.
드르르륵.
실을 끊고 원피스를 다시 뒤집자 터진 자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언니, 손이 뭐 이래유?"
말자가 옆구리 솔기를 엄지로 문지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번 더 문질렀다.
혜령은 원피스를 머리부터 뒤집어쓰더니 옆구리를 더듬었다.

"왜 안 보여?"
"안쪽에서 박았으니까."
'3분. 회사였으면 수선실로 넘겼을 일.'
그때 문지방 쪽에서 혀 차는 소리가 났다. 쪽 찐 머리의 노인이 언제부터 거기 와 있었는지, 문설주에 손을 짚고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자야, 이 처자는 누구라우?"
"아주머니, 제가 이따 말씀드릴게요."
노인은 혀를 또 차더니, 걷혀 있는 보자기를 내려다보기만 하고는 덮지도 않은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말자가 해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덮으라는 말 안 하셨어요. 그럼 써도 된다는 거예요."
혜령이 해주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는데, 눈은 해주의 발에 가 있었다.
"바가지 언니 신발, 외국 신발이지?"
"……응."
"왜 이렇게 하얘?"
해주는 운동화 앞코로 눈을 내렸다. 흙 한 점 묻지 않은 흰 고무가, 마루의 고무신들 옆에서 혼자만 하얬다.
해가 들자 하숙집이 시끄러워졌다. 대학생 하숙생들이 세숫대야를 들고 마당을 오갔다.
마루 기둥에는 누렇게 바랜 종이가 압정으로 박혀 있었는데, 하숙생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힐끔거렸다.
「하숙생 지킬 일 — 식사는 아침 일곱 시, 저녁 여섯 시 반」
「통금 전 귀가. 늦으면 대문 안 엶. 연탄불 함부로 만지지 말 것」
「외부인 재우지 말 것 — 주인」
마지막 줄에서 해주의 눈길이 멈췄다. 마루를 지나던 말자가 종이를 보고 해주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하숙생 아니잖아요."
부엌 벽에는 한 장씩 뜯어 쓰는 일력이 있었고, 맨 위에 오늘 장이 올라와 있었다.
「4月 3日 木曜日」
'그럼 어제는 수요일. 내 어제는 목요일인데.'
요일 하나가 어긋나 있다는 걸 알고 나니, 해주는 그 글자에서 한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부엌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마당을 갈랐다.
"마혜령, 이년아, 세수하라우!"
마루 끝에서 지갑을 집어 들던 해주의 손이 허공에서 잠깐 굳었다.
'마혜령. 우리 실장님이랑 이름이 같네.'
해주는 코로 짧게 웃고 고개를 저었다.
'실장님은 부산 사람이고. 여긴 서울 신촌이고.'
지갑을 열어 보니 카드 세 장과 사원증, 동전이 들어 있었다.
동전은 셋이었다.
해주는 지갑을 한 번 더 털어 보고 마루 틈까지 들여다봤다. 어젯밤 버스에서 셀 때는 분명히 넷이었다. 설마 마루 틈으로 굴러 들어간 건가.
어느새 마루 끝 기둥 옆에 혜령이 와 있었다. 세수하러 가지도 않고 노란 원피스 끝자락을 손가락에 돌돌 말던 혜령은, 해주와 눈이 마주치자 마당으로 냅다 뛰어나갔다.
"할머니, 나 세수해!"
해주가 동전 셋을 손바닥에 올려놓자, 아침 볕에 숫자가 반짝였다.
「2014」 「2017」 「2019」
없어진 하나의 연도는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나쯤이야. 여기선 쓸 수도 없는 돈.'
그날 밤, 라 레느에서 늦게 돌아온 말자는 씻자마자 잠들었고, 숨소리도 금방 고르게 가라앉았다.
해주는 벽에 등을 기대고 휴대폰을 켰다.
「배터리 1% — 충전기를 연결하세요」
이 집 어디에도 맞는 충전기가 있을 리 없으니, 화면을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인 셈이다.
화면을 넘기자 사진첩 맨 앞에 어젯밤 찍은 10초짜리 영상이 떴다. 지하 2층, 형광등 한 줄, 은하 미싱.
재생을 눌렀다.
드르르륵.
작은 스피커에서 재봉틀 소리가 새어 나오자 말자가 잠결에 몸을 뒤척였고, 해주는 얼른 엄지로 소리를 껐다.
소리 없는 화면 속에서 바퀴가 돌았고, 고른 땀이 한 줄씩 생겨났다.

다온의 메시지 창도 열었다. 대화 위쪽에 그 줄이 그대로였다.
「선배 손은 진짜…」
맨 아래엔 「얼른 퇴근해요ㅠ」가 있었고, 그 밑으로 해주가 쓰다 지운 답장 자리는 끝내 채워지지 못했다.
화면이 한 번 깜빡이더니, 그대로 꺼졌다.
해주는 검은 화면을 한참 쥐고 있었다. 손바닥 온기가 유리로 옮겨 갔을 뿐,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이번엔 지갑을 꺼냈다. 사원증 사진 속 자기 얼굴은 웃는 기색 하나 없었다.
「윤해주 / 루다 디자인팀」
'이걸 들고 다닐 수는 없다. 버릴 수도 없다.'
해주는 방 구석 장판 모서리를 들쳤다. 시멘트 바닥과 장판 사이로 손가락 두께만 한 틈이 나 있었다.
휴대폰을 먼저 밀어 넣고, 지갑은 그 옆에 뉘었다.
장판을 내린 다음 손바닥으로 두 번 폈고, 불룩한 자리가 남지 않을 때까지 꾹꾹 눌렀다.
말자가 또 뒤척였다. 해주는 장판 위에 손을 얹은 채 숨을 죽였다. 다행히 말자는 깨지 않았다.
벽 너머에서 연탄이 가라앉는 소리가 나더니, 장판이 손바닥 밑에서 천천히 데워졌다.
그 밑에서, 휴대폰은 식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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