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3. 1.5센티
새벽, 부엌방. 해주는 장판 모서리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로 눈을 떴다.
장판은 반듯했다. 밤사이 아무도 들춘 흔적이 없었다.
말자는 벌써 일어나 입에 실핀 두 개를 문 채 머리를 틀어 올리는 중이었다.
"언니, 일어났어요? 오늘 라 레느 원단 들어오는 날이에요."
말자는 실핀을 하나씩 꽂으면서 말을 이었다.
"짐 나를 사람이 모자라요. 뒷문에서 아홉 시에 일꾼 찾을 거예요. 하루 일당 3천 원 남짓."
'3천 원. 버스 서른 번. 짜장면 여덟 그릇.'
"나는 언니 모르는 척할게요. 언니도 나 모르는 척해요. 원장님이 알면 둘 다 끝이에요."
"……알았어요."
말자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해주는 그 손가락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결국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라 레느에선 남남. 1980년식 근로계약서.'
마루로 나가 보니 혜령이 어제 고친 노란 원피스를 입고 세숫대야 앞에 쪼그려 앉아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바가지 언니 어디 가?"
"일하러."
"왜?"
"돈 벌어야 해서."
"왜?"
해주는 대답하는 대신 혜령의 옆구리 솔기를 엄지로 꾹 눌러 보았다. 솔기는 단단했고, 혜령은 간지럽다며 몸을 비틀고 깔깔 웃었다.
말자가 신발을 꿰면서 해주를 재촉했다. 해주가 흰 운동화를 신는 동안에도 혜령의 눈은 그 신발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전 아홉 시, 라 레느 뒷문 골목은 리어카 두 대에 꽉 막혀 있었다.
리어카마다 원단 두루마리가 산처럼 실려 있었는데, 젊은 짐꾼 하나가 해주를 보더니 리어카를 한쪽으로 비켜 세웠다.
"아가씨가 나른다고? 이거 한 필에 10킬로는 넘어."
짐꾼이 꼬깃꼬깃한 납품 쪽지를 건네자 말자가 받아 읽고 경리에게 넘겼다. 해주의 눈도 저절로 그 종이를 따라갔다.
▣ 납품 — 라 레느 귀하 순모 감색 2필 / 회색 모직 3필 안감 4필 / 심지 1필 대금은 월말 정산
'모직 5필. 맞춤집 한 달 치. 단골이 많다는 얘기.'
두루마리 하나를 어깨에 올리자 무릎이 한 번 휘청했다. 그래도 해주는 이를 악물고 계단을 올랐다.
끼익.
나무 계단이 칸마다 울어 대는 걸 들으며 2층에 올라가, 재단대 옆에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쿵.
뒤따라온 짐꾼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 아가씨 힘 좋네. 시골서 농사지었어?"
"……비슷한 거요."
'원단은 8년 내내 택배로 받았는데.'
두 번째 두루마리를 지고 1층을 지나던 참이었다. 재단대 앞에 한 여자가 버티고 있었다.
은테 안경을 코에 걸친 50대로, 흰머리를 검게 물들여 높이 틀어 올렸고 회색 투피스 허리춤에는 가위가 매달려 있었다. 그저께 밤 다락에서 들은 목소리의 주인이 틀림없었다.
원장이 안경 너머로 해주를 올려다보았다.
"아가씨, 그 옷은 뭐요?"
"……작업복이에요."
"작업복을 그렇게 크게 짓는 데도 있소?"
"일꾼이라서요."
해주가 계단 쪽으로 돌아서는데, 재단대 끝에서 말자가 막 원단에 가위를 대던 참이었다.
"공 양, 가위 내려놓으시오. 그건 공 양 손이 아니오."
말자는 가위를 내려놓고, 괜히 실핀 하나를 뺐다가 도로 꽂았다.
"네, 원장님."
'공 양. 말자 씨 성이 공이구나.'
해주는 말자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말자도 해주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어차피 아침에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한 약속이었으니 말이다.
2층 재단대에는 재킷 견본이 하나 걸려 있었다. 따라 올라온 원장이 늙은 재단사에게 일렀다.
"소맷부리 가에리 넉넉히 두시오. 손님 팔이 기오."
'가에리. 접어 올린 단. 오랜만에 듣는다.'
원단을 내려놓던 해주는 무심코 견본 소맷부리를 집어, 엄지와 검지로 접힌 폭을 가늠했다.
'4센티. 팔 긴 손님이면 5는 둬야 내린다.'
늙은 재단사가 해주의 손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자를 집어 같은 자리를 재 보고는 원장 쪽을 힐끔거렸다.
해주가 손을 떼고 고개를 들자, 원장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해주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원장의 입이 한 박자 늦게 열렸다.
"어디서 일했소?"
"……동대문이요. 잠깐."
"동대문."
원장은 그 말을 되뇌면서, 공장 이름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입가를 굳혔다.
"……짐은 저쪽이오."
"네."
해주는 원단 더미 쪽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 꽂힌 원장의 시선은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열두 시가 넘자 2층 창고에는 해주 혼자 남았다. 두루마리를 필 수대로 세우고 나니 셔츠 등판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때 창고 문이 살짝 열렸다. 말자였다. 말자는 해주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선반 위에 신문지 뭉치 하나를 올려놓더니, 그대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신문지를 펼치자 아직 따뜻한 주먹밥 두 개가 나왔는데, 김 대신 소금이 굵게 박혀 있었다.
'남남이라더니.'
해주는 원단 더미에 등을 기대고 주먹밥을 먹었다. 소금이 혀끝에서 오래도록 짰다. 아마 일부러 굵게 뿌린 걸 거다.
오후 두 시, 1층 가봉실 앞 칠판에는 분필 글씨가 적혀 있었다.
「4일(금) 오후 2시 — 민 여사님 가봉(2차)」
마지막 두루마리를 가봉실 옆 창고에 넣고 나오는데, 가봉실 문이 반쯤 열린 채였다.
거울 앞에는 마흔 남짓한 부인이 진주 귀걸이를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말아 올린 채 팔을 들고 있었다. 말투보다 눈이 먼저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사모님이 팔을 내리자, 회색 모직 재킷의 오른쪽 단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처졌다.
"원장님, 지난번에도 이랬잖아요."
"가봉은 세 번이오, 사모님. 두 번째에 다 잡힙니다."
원장은 손가락 두 개로 사모님의 어깨를 툭 쳤다. 옆에서 말자가 펼쳐 든 치수장은 문간에서도 훤히 보였다.
▣ 라 레느 치수장 — 민 여사님 투피스 어깨너비 38cm 등길이 37cm 상의 기장 좌우 58cm
'좌우 58. 한쪽만 재고 똑같이 나눴다.'
재킷 자체는 좋은 옷이었다. 깃은 목에 붙어 돌았고, 앞여밈 박음질도 자로 그은 듯 곧았다.
'손은 정확한데. 숫자가 틀렸다.'
해주의 손이 목으로 올라가 줄자를 풀었고, 그사이 발은 저절로 문턱을 넘고 있었다.
"사모님, 일단 대 볼게요."
"누가 손님 몸에 손을 대라 했소?"
해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줄자를 사모님의 목 뒤에 걸어 양 어깨 끝으로 늘어뜨렸다. 오른쪽 눈금이 아래로 처졌다.
'1.5. 왼쪽이 높다.'
"오른쪽 어깨가 1.5센티 낮으세요. 가방을 늘 오른쪽에 드시죠?"
사모님이 거울 속 자기 팔로 눈을 돌렸다. 핸드백이 오른팔에 걸린 채였다.
"오른쪽만 패드를 더 넣고 단을 올리면 돼요."
"패드?"
"어깨심이요."
해주가 말자의 손목에 꽂힌 바늘꽂이에서 핀 두 개를 뽑자 말자가 숨을 멈췄다. 물론 해주는 말자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핀 두 개로 오른쪽 단을 접어 올리자, 사모님이 거울 앞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단이 바닥과 나란히 따라 돌았다.

"어머!"
가봉실이 조용해진 사이, 원장의 허리춤에서 가위가 부딪혔다.
달그락.
"원장님, 다음 가봉은 이 아가씨가 봐 줘요."
"사모님, 저 아이는 오늘 온 일꾼입니다."
"그러니까요. 오늘 와서 이걸 봤잖아요."
원장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금세 제 색으로 돌아왔다. 손님 앞이라 웃기는 웃었는데, 입만 웃고 있었다.
"사모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오른쪽 어깨심은 제가 직접 넣지요."
민 여사의 눈이 거울 속 해주에게 한 번 더 갔지만, 해주는 이미 문간까지 물러나 있었다.
'첫 지명. 일당은 그대로겠지만.'
해주는 빈손을 핑계 삼아 2층 계단참으로 올라섰다. 볕 속에서 원단 먼지가 느릿느릿 떠돌았다.
몇 초 뒤 치수장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말자가 따라 올라오더니, 해주 옆에 붙어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언니, 미쳤어요. 원장님 얼굴 봤어요?"
"못 봤어요. 사모님 어깨만 봤어요."
"원장님이 손님한테 자기 손으로 넣겠다는 소리 하는 거, 나 4년 만에 처음 들었어요."
말자가 치수장을 펼쳐 해주 코앞에 들이밀고는, 손가락으로 '58' 두 개를 번갈아 짚었다.
"근데 언니, 어떻게 알았어요? 원장님이 재고 내가 받아 적었는데."
"가방이요. 들어올 때부터 오른쪽으로 들고 계셨어요. 늘 한쪽으로 드는 사람은 그쪽 어깨가 내려앉아요."
"가방 보고요?"
"어깨 보고요. 가방은 확인이고."
말자는 입을 벌린 채 치수장을 내려다보다가, 연필로 '58' 하나에 작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러고도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지 치수장으로 입을 가리는 말자의 옆얼굴을 보다가, 해주가 생각난 듯 물었다.
"말자 씨, 공씨였어요? 우리 회장님도 공씨인데."
"회장님이요? 언니 회사 회장님?"
"네. 얼굴은 아무도 모르지만."
"회사가 얼마나 큰데 회장님 얼굴을 몰라요?"
"아주 커요. 옷 만드는 회사."
말자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공씨가 뭐 한둘이유."
하긴 흔한 성이었다. 아래층에서 원장이 공 양을 찾는 소리가 들리자, 말자는 치수장을 고쳐 안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해 질 무렵, 해주는 1층 재단대 앞으로 불려 갔다.
재단대 너머의 원장은 허리의 가위에 손을 얹은 채, 재단대 위에 놓인 자를 손가락 끝으로 반듯하게 밀었다.
탁.
재단대 끝에서 시침실을 뽑던 말자가 그대로 굳었다.
"그쪽은 오늘 원단을 나르러 오신 분 아니십니까."
목소리가 아침보다 한층 낮아졌고, 말씨는 오히려 깍듯해졌다.
'반말보다 무서운 존댓말.'
"네."
"제 가봉실에 들어오라고 누가 허락했습니까."
"……아무도요."
"그런데 제 손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제 치수장을 틀렸다고 하셨습니다. 제 손님 앞에서."
"……틀렸으니까요."
재단대 끝에서 말자의 손이 굳었다. 원장은 재단대 위의 자를 한 번 더 반듯하게 밀었다.
"가봉을 그렇게 보는 법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엄마한테요. 수선집을 했어요."
안경 너머에서 원장의 눈이 한 번 가늘어졌다. 비웃음인지 다른 무엇인지, 아직 해주가 읽어 낼 수 있는 얼굴은 아닌 거다.
원장은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고 나서 다시 썼다.
"내 가게에서 손님을 훔쳐 가시겠다?"
'훔친 게 아니라 1.5센티를 고친 건데.'
원장이 경리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자, 경리 아주머니가 누런 봉투 하나를 재단대 위로 밀었다.
「일당 — 1,500원」
"오늘 일당은 반만 드리겠습니다. 나머지 반은 제 가봉실 값으로 치겠습니다."
해주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사실 하루 품삯을 반이나 떼인 셈이다.
봉투를 쥔 채 재단대 끝으로 눈을 돌렸지만, 말자는 시침실 뭉치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약속대로였다.
"나가 주십시오. 다시는 이 문턱 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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