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지명
라 레느 뒷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철컥.
골목에 선 채 봉투를 열어 보니 천 원짜리 한 장에 100원짜리 동전 다섯 개, 도합 1,500원이었다.
'1980년 첫 월급. 하루 치의 반.'
해가 넘어가는 골목은 금세 어두워졌다. 불이 켜진 건 2층 창 하나뿐이었는데, 커튼 뒤로 오가는 그림자가 말자인지 원장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해주는 그 창을 올려다보다가 돌아섰다. 말자는 약속대로 따라 나오지 않았다.
골목 끝에는 이 동네 골목에 어울리지 않게 반짝이는 검정 승용차 한 대가 대어져 있었다.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흰 장갑을 낀 중년 남자가 내렸다.
"아까 가봉실에 계셨던 분 맞지요?"
"……네."
"사모님이 어디 계시는지 여쭈랍니다."
남자가 수첩과 만년필을 꺼냈지만, 해주의 입은 선뜻 열리지 않았다.
'어디 계시냐니. 다락이라고 할 수도 없고.'
남자는 재촉하는 기색도 없이, 만년필 뚜껑만 열어 둔 채 기다렸다.
"신촌이요. 박 여사네 하숙집."
해주는 거기서 입을 닫았다. 물론 말자의 이름까지 댈 이유는 없었다.
남자는 받아 적은 한 장을 찢어 해주에게 내밀었는데, 틀린 데가 없는지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신촌 박 여사댁 하숙집 — 바지 입은 아가씨」
'바지 입은 아가씨. 주소보다 정확하다.'
"내일 오전에 사모님 모시고 가겠습니다."
부르릉.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자 해주는 봉투를 바지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정류장 앞에서 해주는 걸음을 멈췄다. 마침 신촌 방면 버스가 들어와 있었고, 안내양이 문간에서 손님을 부르는 중이었다.
'버스 90원. 걸으면 0원.'
해주는 그 버스를 그냥 보내고 걷기 시작했다. 명동 입구를 빠져나오자 길이 넓어졌고, 서울역 앞 고가 밑을 지나 아현 고개를 넘었다.
거리는 2026년보다 어두웠고 간판 불빛도 띄엄띄엄했다. 그 대신 사람들의 옷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칼라는 넓게, 바지는 나팔, 허리는 조이고.'
양장점 쇼윈도를 지날 때마다 해주의 걸음이 느려졌다. 마네킹 어깨를 훑고, 단을 살피고, 박음질까지 들여다보느라 걸음이 자꾸 붙잡혔다.
'46년 뒤엔 이게 레트로라고 비싸게 팔린다.'
신촌 골목에 들어섰을 때는 다리가 뻐근했다. 꼬박 한 시간 반을 걸은 길이었다. 솔직히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버스 생각이 났다. 그래도 주머니 속 1,500원은 그대로였으니, 남는 장사이긴 한 셈이다.
그날 밤, 해주가 부엌방에 혼자 앉아 있는데 말자가 늦게 들어왔다. 말자는 신발을 벗자마자 해주에게 기다리라고 손짓하고는 마루로 나갔다.
곧 문 너머에서 말자가 박 여사에게 말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 그 언니 말이에요. 며칠만 제 방에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어디서 온 사람인데?"
"아는 언니예요. 시골서 올라왔는데 갈 데가 없대요. 방세는 제가 더 일해서 낼게요."
박 여사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고, 혀 차는 소리만 한 번 났다.
"이름은 뭐이가?"
"해주래요."
문 너머에서 행주를 터는 소리가 한 번 났다. 해주는 쥐고 있던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해주……."
박 여사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고 이름은 내 고향 이름이라. 황해도 해주. 못 부르겠다."
"……네, 아주머니."
"처자라 하자우."
발소리가 부엌 쪽으로 멀어지자, 해주는 문에 등을 기댄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향 이름. 내 이름이 누군가한테는 못 가는 땅이구나.'
빈손으로 들어온 말자가 문을 닫고 해주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다 들었죠?"
"……네."
옆방에서 혜령이 잠꼬대를 하는 사이, 말자는 머리의 실핀을 하나씩 빼서 베갯머리에 늘어놓았다.
이불을 펴러 일어서던 해주의 눈에 문틈으로 부엌 앞 걸레 바구니가 걸렸다. 맨 위에 걸쳐진 남색 치마는 허리 고무줄이 늘어나고 밑단이 해졌을 뿐, 천은 멀쩡했다.
"말자 씨, 저 치마 버리는 거예요?"
"아주머니 거요? 걸레 한대요."
"걸레 하기엔 아까운데."
해주는 치마를 들고 부엌방으로 들어와 솔기를 뜯고, 실밥을 손톱으로 하나씩 끊어 냈다. 그러고는 천을 장판 위에 펴 놓고 혜령의 키를 머릿속에 세웠다.
'키 110 남짓, 가슴 56. 품은 넉넉히.'
가위는 박 여사의 반짇고리에서 빌렸다.
사각, 사각.
말자는 이불 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그 손을 지켜보았다.

"언니는 잠도 안 자요?"
"잠이 안 와서요."
"오늘 쫓겨났는데요?"
"그러니까요."
말자가 이불 속에서 키득거렸다. 해주는 시침실로 앞판과 뒤판을 대충 붙인 다음, 옆구리 솔기 안쪽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숨겨 달았다. 자정 사이렌이 울릴 무렵 말자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토요일 아침, 세숫대야를 들고 마루로 나오니 기둥의 「하숙생 지킬 일」 옆에 종이 한 장이 더 박혀 있었다.
「숙박계 — 4월」
「1호 김정수 / 2호 이상철 / 3호 최영길」
「부엌방 공말자」
그 아래 한 칸은 볼펜 자국 하나 없이 비어 있었다. 아마 거기 들어갈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거다.
마당에서는 박 여사가 젖은 홑청을 털고 있었다.
탁.
박 여사는 마루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빨랫줄에 홑청을 걸고 집게를 물렸다.
그때 대문 밖에서 엔진 소리가 멎었다. 골목 사람들이 하나둘 창문을 열었고, 대문 틈으로 내다보던 박 여사는 빨래 바구니를 마루 끝에 내려놓았다.
어제의 그 검정 승용차였다. 기사가 뒷문을 열자 민 여사가 먼저 내리고, 스무 살 남짓한 아가씨가 뒤따라 내렸다.
"아가씨, 어제는 미안했어요. 원장님이 그렇게 내보낼 줄은 몰랐어요."
"괜찮습니다."
"우리 딸이에요. 다음 주 일요일에 상견례가 있어요."
마당을 두리번거리던 딸은 해주의 바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금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골목 사람들은 창문 틈으로 연신 기웃거렸다. 마당에서 세수하던 하숙생 하나가 수건을 목에 건 채 휘파람을 불었지만, 박 여사가 그쪽을 한 번 노려보자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박 여사의 눈이 해주에게서 민 여사의 진주 귀걸이로 갔다가 돌아왔다. 이번엔 혀도 차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방석 두 장을 들고 나왔다. 저 깐깐한 양반이 방석까지 내오다니, 별일도 다 있는 셈이다.
마루에 방석이 깔리자, 해주는 목에서 줄자를 풀었다.
"일단 대 볼게요."
딸이 쭈뼛거리며 일어서자 해주는 그 어깨에 줄자를 걸었다.
'어깨 37. 좌우 같다. 엄마보다 반듯하네.'
팔길이는 오른팔을 재고, 왼팔을 재고, 한 번 더 쟀다.
'오른팔이 1센티 길다. 테니스? 아니면 붓.'
"혹시 오른손으로 오래 하시는 거 있으세요?"
"……피아노요. 왼손보다 오른손을 많이 써요."
"오른쪽 소매만 1센티 길게 갈게요."
딸이 엄마를 돌아보자, 민 여사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치수 — 민 여사님 따님 어깨너비 37cm 가슴둘레 82cm / 허리 62cm 소매길이 왼 56cm · 오른 57cm 상의 기장 56cm / 치마 기장 64cm
"감은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순모요."
딸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대답했다.
"시어머니 되실 분이 옷을 보신대요. 모직은 손으로 만져 보면 안대요."
'만져 보면 안다. 그 말은 맞다.'
"모양은 어떻게 할까요?"
"라 레느에선 원장님이 잡지에서 골라 주셨는데."
딸의 눈이 엄마 쪽으로 가자, 민 여사가 해주에게 손바닥을 펴 보였다. 해 보라는 뜻이었다.
해주는 말자가 두고 간 갱지 한 장을 무릎에 펴고 연필을 쥐었다.
'상견례 옷. 앞서가면 시어머니가 놀란다. 반 걸음만.'
선이 빠르게 나갔다. 둥근 깃에 허리를 살짝 조인 재킷, 무릎을 덮는 플레어 치마를 그리고, 앞여밈 단추는 넷 대신 셋으로 줄였다.
"깃은 작게 둥글게 갈게요. 요즘 넓은 깃보다 얼굴이 작아 보여요. 단추는 셋. 앉았을 때 앞이 벌어지지 않게."
그림을 들여다보던 딸의 손가락이 둥근 깃을 따라갔다.
"……이거요. 엄마, 나 이거 할래."
민 여사는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라 레느 잡지보다 낫네."
민 여사가 핸드백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값은 10만 원으로 하지요. 선금으로 반 드리고."
"……네."
▣ 주문 — 상견례 투피스 한 벌 값 10만 원 / 선금 5만 원(받음) 납기 4월 12일(토) — 상견례 전날
'오늘이 5일. 일주일. 가위도 재봉틀도 남의 것.'
손에 얹힌 봉투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하긴 반나절 품삯이 동전 몇 닢인 동네에서 받아 든 돈이니, 무거울 수밖에 없는 거다.
딸이 마루 끝에서 치마 길이를 다시 재는 동안, 손님 구경을 하느라 기둥 뒤에서 머리만 내밀고 있던 혜령이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해주는 부엌방에 들어가 개켜 둔 천을 들고 나왔다. 어젯밤 걸레 바구니에서 건진 치마로 지은 남색 면 원피스였다.
"혜령아, 이리 와 봐."
혜령이 쭈뼛쭈뼛 다가오자 해주는 원피스를 머리부터 씌웠다. 품이 넉넉했는데, 크면서 입으라고 일부러 그렇게 잡은 것이었다.
원피스 옆구리를 더듬던 혜령의 손이 어딘가에 걸렸다.
"왜 주머니가 있어?"
"……보물."
"보물?"
"넣으라고."
혜령은 주머니에 양손을 넣었다 뺐다가 다시 넣어 보더니, 할머니한테 보여 준다며 부엌으로 뛰어갔다.
타다닥.
민 여사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아가씨, 저것도 아가씨가 지었어요?"
"헌 치마로요."
민 여사는 혜령이 뛰어간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해주를 보았다.
"아가씨,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물었네. 이름이 뭐예요?"
해주는 잠깐 말을 골랐다.
"그냥 아가씨라고 불러 주세요."
"이름이 없어요?"
"옷에도 안 붙이는 이름이라서요."
민 여사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갱지에 그린 그림을 접어 핸드백에 넣었다.
그러고는 마루에 남은 실밥을 손끝으로 집어 들었다. 시침실이 고른 간격으로 박힌 실밥이었다.
부엌 안에서 박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혀 차는 소리가 먼저였고, 웃음 섞인 잔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이년아, 그거 내 치마 아니가. 기래, 잘 어울린다."
대문 앞에서 기사가 차 문을 열었다. 한 발을 차에 올리던 민 여사가 문득 돌아섰다.
"참, 아가씨."
"네."
"라 레느에선 원단을 대 줬지만."
민 여사가 장갑 낀 손으로 해주의 줄자를 가볍게 들었다가 놓았다.
"옷감은 그쪽이 구해 와요."
차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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