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마와 미터
월요일 아침, 부엌방. 해주는 장판 위에 선금 봉투를 엎어 놓고 돈을 셌다.
만 원짜리 다섯 장에 잔돈 1,500원.
'5만 1,500원. 납기까지 닷새.'
다 세고 나서 한 번 더 셌지만,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그때 마루에서 소리가 났다.
짤랑.
혜령이 마루 끝에 앉아 제 동전을 세는 중이었다. 10원짜리 몇 개에 50원짜리 하나, 박 여사가 사탕 값이라며 쥐여 준 돈이었다.
동전을 하나씩 손바닥에 늘어놓던 혜령은 해주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해주가 지어 준 남색 원피스의 그 숨은 주머니였다.
'보물 주머니에 보물 넣는 중.'
머리를 틀어 올리던 말자가 부엌방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언니, 오늘 원단 사러 가죠? 나도 반나절 같이 가요."
"라 레느는요?"
"원장님이 광장시장에 안감 심부름 보냈어요. 오후에 들어가면 돼요."
말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누가 물어보면 나는 손님 길 안내만 한 걸로 해요."
그 말을 해 놓고 말자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소리 없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오전 열 시, 동대문 원단 골목은 이미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리어카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벽에 붙어 길을 텄고, 상인들은 가게 앞에서 두루마리를 폈다 접었다 했다. 골목마다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르륵.
골목 입구에서 해주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대학 때 아르바이트하던 동대문과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카드 단말기 소리 대신 주판. 계산은 더 빠르다.'
순모를 쌓아 둔 가게 앞에서 말자가 해주의 소매를 끌었다. 진열대 위 감색 순모가 반들반들 윤이 났고, 해주는 손을 뻗어 끝을 엄지와 검지로 비볐다.
'좋다. 촘촘하고 탄력 있다. 만져 보면 아는 원단.'
"이거 한 마에 얼마예요?"
"2만 원. 영국 실로 짠 거요."
상인이 두루마리를 들어 보이자, 해주는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벌려 원단 폭을 뼘으로 쟀다. 다섯 뼘 하고 조금이었다.
'110. 좁다. 소매가 몸판 옆에 안 들어간다.'
"투피스 한 벌이면 몇 마 끊어야 해요?"
"아가씨 몸이면 세 마 반은 잡아야지."
'3마 반이면 7만. 선금이 통째로 날아가고도 모자란다.'
해주가 원단을 내려놓자 상인도 눈치를 채고 두루마리를 도로 감았다. 말자가 해주를 올려다보았다.
"비싸요?"
"딸이 순모를 원했어요. 순모는 원래 비싸요."
말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둘은 다음 가게로, 또 그다음 가게로 발길을 옮겼다.
세 번째 가게 주인은 해주의 바지를 보고 서울 손님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반들반들한 감색 원단부터 들이밀었다.
"이건 마당 만 원. 순모랑 똑같아. 아무도 몰라."
이번엔 해주도 원단 끝을 비벼 볼 생각조차 없었다. 손톱으로 올 하나를 살짝 뽑자, 올이 끊어지기는커녕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테트론 섞였네요. 반은 넘게."
주인의 얼굴이 굳었고, 말자는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물론 주인도 그걸 모르고 내놓았을 리는 없을 거다.
"……아가씨, 어디서 장사했어?"
"순모는 이렇게 안 늘어나요. 다리미 대면 반짝거리고요."
주인이 원단을 거칠게 도로 감는 동안 둘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말자가 해주의 팔을 꼬집었다.
"언니, 손톱으로도 알아요?"
"손톱이 제일 정확해요."
네 번째 가게를 나서면서 말자가 손가락을 꼽았다.
"언니, 여기도 110이에요?"
"110. 다 좁아요."
"값은 다 2만이고요?"
"다 2만이고요."
말자는 시장 바닥에 대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이 골목에서 넓은 폭을 찾기는 글렀다는 얘기였다.
정오 무렵, 둘은 광장시장 입구에 닿았다.
시장 어귀에는 어깨에 총을 멘 군복 차림 남자 둘이 말없이 버티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그 둘을 피해 반걸음씩 돌아 지나갔다.
말자도 그랬고, 해주도 말자를 따라 반걸음 돌았다. 군복 하나가 해주의 바지에 눈길을 주는 게 느껴졌지만, 해주는 시선을 땅에 박은 채 걸었다.
몇 걸음을 지나고서야 말자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요새는 그냥 지나가면 돼요. 쳐다보지 말고."
해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시선은 아까부터 땅에 박혀 있었다.
어귀를 지나자 미싱 상회가 하나 나왔다. 쇼윈도에 새 재봉틀 세 대가 나란히 진열돼 있었는데, 검은 몸체에 금색 글씨가 반짝였다.
해주의 발이 저절로 멈췄다.
가운데 재봉틀 받침대 옆에 철판 상표가 박혀 있었다.
「은하 미싱」
아카이브실에서는 반쯤 벗겨져 있던 금색 글씨였다. 해주는 그 철판을 알았다. 발판의 덩굴무늬도, 북집 뚜껑의 나사도 그대로였고, 기름을 먹이던 바로 그 자리들까지 똑같았다. 설마 아카이브실의 그 기계가 여기 진열돼 있는 건가.
'46년 전의 은하. 같은 모델일까, 그 한 대일까.'
손이 유리에 닿을 뻔한 순간, 쇼윈도 안쪽에서 신문을 넘기던 상회 주인이 해주를 힐끔거렸다.
"언니?"
말자가 해주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해주는 쇼윈도에서 눈을 뗐다가 도로 붙였다가, 다시 떼어 냈다.

'지금은 아니다. 투피스가 먼저다. 닷새.'
"말자 씨, 저런 재봉틀은 얼마 해요?"
"발틀이요? 7만 원쯤요. 월부로 많이들 사요. 왜요, 언니 하나 사게요?"
'7만. 지금 내 돈으로는 바퀴 하나.'
"……아니요. 가요."
해주는 걸음을 뗐지만, 등 뒤에서 금색 글씨가 오래도록 따라왔다.
말자가 데려간 곳은 광장시장 안쪽의 원단 가게였다. 붓글씨로 쓴 간판이 문 위에 달려 있었다.
「변가 상회 — 모직·순모·양복지」
가게 안에서는 배가 나오고 눈이 작은 쉰 줄의 남자가 주판을 튕기다가, 말자를 보더니 손을 멈췄다.
"공 양 아닌가. 심부름이야?"
"네, 사장님. 안감 좀 보러요."
"원장님 심부름에 손님까지 달고 왔어?"
변 사장의 작은 눈이 해주의 바지에서 줄자로, 줄자에서 얼굴로 차근차근 올라왔다.
"길 안내예요. 이 언니가 원단을 찾는대서요."
"라 레느 손님은 라 레느가 원단을 대는데."
"라 레느 손님 아니에요."
말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했는데, 서울말이 제법 매끄러웠다. 변 사장은 그 웃음을 한참 뜯어보다가 다시 주판으로 돌아갔다.
말자가 해주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라 레느도 여기서 떼요. 원장님 눈이 있어요. 조심해요."
해주는 말자 귀에 대고 "네." 하고만 답했다. 그러다 벽에 걸린 감색 순모 두루마리가 눈에 들어왔는데, 동대문에서 본 것들보다 두루마리가 훨씬 굵었다.
"사장님, 저 순모는 한 마에 얼마예요?"
"그건 광폭이야. 마당 2만."
해주가 다가가 원단 끝을 펼쳤는데, 이번엔 뼘으로는 모자라서 아예 팔을 쫙 벌려야 했다.
'150. 광폭.'
머릿속에서 숫자가 굴렀다.
▣ 해주의 셈 — 마와 미터 1마 ≈ 0.91m → 3마 ≈ 2.7m 폭 150 → 소매 두 장이 몸판 옆에 들어간다 3마 반 아니고 3마
"3마면 돼요."
변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투피스 한 벌을? 세 마 반은 잡아야지."
"폭이 넓잖아요. 소매를 옆으로 앉히면 3마로 나와요."
주판을 내려놓은 변 사장은 해주를 새삼 뜯어보더니, 벽에 걸린 마 자를 내려 원단에 댔다. 마 자가 원단 위를 세 번 건너갔다.
해주의 눈이 마 자 끝으로 갔다. 눈금 끝의 나뭇결이 닳아서, 손가락 하나만큼 짧아져 있었다.
'저 자로 재면 석 마가 석 마가 아니다.'
"사장님, 그 자 끝이 닳았어요. 손가락 하나만큼 짧은데요."
변 사장은 헛기침을 하고 자를 뒤집어 보더니, 또 헛기침을 했다. 헛기침만 거듭하는 걸 보면 할 말이 궁한 모양이다.
"……1만 9천에 해 주지."
말자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해주를 가게 밖으로 끌고 나왔다.
"언니, 그 자 짧은 거 어떻게 알았어요? 나 그 자 4년 동안 봤는데."
"눈금 끝이 반들반들했어요. 많이 잰 자는 끝이 닳아요."
"폭은요? 세 마 반이 세 마 되는 거는요?"
"폭이 넓으면 옆으로 더 앉혀요. 퍼즐처럼."
말자가 해주의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나도 가르쳐 줘요."
해주는 말자의 손바닥을 펴게 하고, 그 위에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렸다.
"이게 원단 폭이에요. 몸판 앞뒤 두 장을 여기, 여기 놓고."
"네."
"좁은 원단이면 소매는 아래로 내려가야 해요. 그만큼 길이가 더 들어요. 넓은 원단이면……."
"옆에 놓는다!"
말자가 해주의 손가락을 밀어내고 제 손가락으로 빈자리를 짚었다. 정확한 자리였다.

'빠르다. 손은 원래 빠른 애다.'
말자의 얼굴에는 농담기가 하나도 없었다.
"……좋아요. 대박이네, 말자 씨."
"대…… 뭐요?"
말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바가지 터지는 소리 같네. 대박이 뭐예요?"
'아차.'
해주는 헛기침으로 얼버무렸는데, 하필 변 사장 흉내 같은 소리가 나와 버렸다. 말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해주는 봉투를 꺼내기 전에 변 사장에게 먼저 운을 뗐다.
"사장님, 오늘 반만 드리고 나머지는 납품 받고 드려도 될까요?"
변 사장은 주판에서 손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얼굴한테 외상은 없어. 공 양 얼굴 봐서 깎아 준 것만 해도 많이 해 준 거야."
시장 골목 담벼락에 기대 해주는 봉투와 쪽지를 같이 펼쳤다. 담벼락의 회칠이 등에 하얗게 묻어났다. 옆에서 말자가 주판 대신 손가락을 접어 나가다가, 열 손가락으로는 모자라 접은 걸 도로 폈다.
순모만 사서는 옷이 되지 않는 법이다. 안감, 심지, 단추, 실까지, 옷 한 벌에 딸린 것들이 하나같이 값을 달고 줄줄이 따라왔다.
▣ 장보기 — 상견례 투피스 순모 광폭 3마 × 1만 9천 = 5만 7천 안감 3천 / 심지 1,500 / 단추 1,000 / 실 1,000 합계 6만 3,500원 가진 돈 5만 1,500원
해주는 봉투 속 지폐를 손끝으로 한 장씩 밀어 넘겨 보았지만, 아침에 센 그대로였다. 하긴 그사이 돈이 불어날 리도 없었다.
셈을 처음부터 다시 해 보는 해주 옆에서, 말자도 손가락을 다시 접었다.
'폭으로 반 마 줄이고, 자로 천 원 깎았다. 그래도.'
"언니, 안감을 싼 걸로 하면요?"
"순모 겉감에 싼 안감 대면 옷이 울어요. 사흘이면 표 나요."
"단추는 내가 라 레느 자투리에서……."
"그건 훔치는 거예요, 말자 씨."
말자는 접고 있던 손가락을 주먹으로 말아 쥐었다. 시장 끝에서 주판알이 또 튕겼다.
차르륵.
리어카 하나가 골목으로 들어왔다.
덜컹.
둘이 벽에 바짝 붙어 리어카를 보내고 나자, 말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얼마 모자라요?"
해주는 봉투를 접었다.
'일당 3천짜리 일자리도 잃었다.'
"1만 2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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