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검문
화요일 아침, 해주는 라 레느 뒷골목 쓰레기통 옆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 말자를 기다렸다.
어젯밤 말자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 뒷골목에서 기다려요."
그 한마디만 하고 말자는 돌아누웠다.
골목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연탄재를 실은 리어카가 덜컹거리며 지나가자 두부 장수가 종을 흔들며 뒤를 따랐고, 2층 창마다 이불이 하나둘 내걸렸다. 그런데도 라 레느 1층 쇼윈도에는 아직 커튼이 쳐져 있었다.
'명동의 여왕도 아침엔 뒷골목부터 연다.'
반쯤 열린 뒷방 창 너머로 경리 아주머니의 책상이 보였는데, 주판과 장부 옆에 누런 봉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말자가 그 방으로 들어오더니 앞치마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쪽지를 내려놓기까지 손이 두 번이나 망설였다.
「가불 신청 — 공말자 / 일금 1만 5천 원」
경리 아주머니가 안경을 밀어 올리고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한 달 치 반을 당겨 가? 무슨 일 있어?"
"시골 오빠 학비요."
"학비를 왜 공 양이 대?"
"……집이 그래요."
'오빠가 있었나. 성이 공씨인 것 말고는 모른다.'
하긴 따지고 보면 해주가 말자에 대해 아는 건 그게 전부인 셈이다.
경리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고 서랍을 열더니, 월급봉투 하나에 지폐를 세어 넣고 봉투 겉에 도장을 꾹 눌렀다.
쿵.
그때 복도 쪽에서 원장의 목소리가 났다. 말자는 얼른 봉투를 앞치마 안쪽에 밀어 넣고, 원장이 지나갈 때까지 장부 쪽으로 몸을 숙인 채 버텼다.
몇 분 뒤 뒷문이 열리고 골목으로 나온 말자가 해주에게 봉투를 내밀었는데, 그새 뛰었는지 숨이 차 있었다.
"원단 사요. 오늘 저녁에."
해주는 봉투를 받지 않았다.
"말자 씨 월급이잖아요."
"반이요. 반은 남았어요."
"그럼 말자 씨는 이번 달 뭘로……."
"언니가 나 가르쳐 준다면서요."
말자는 봉투를 해주 손에 쥐여 주고, 해주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봉투를 감싸게 했다.
"수업료예요. 선불."
말자의 품에서 막 나온 봉투는 아직 따뜻했다. 반 달 치 월급의 온기라고 생각하니 손바닥이 괜히 뜨거웠다.
'갚는다. 1만 5천. 잊지 말 것.'
말자가 뒷문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안에서 원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공 양, 어디 갔다 오시오."
낮의 부엌방에는 볕이 들었고, 해주는 그 볕 아래 장판 위에 갱지를 펼쳤다.
원단은 아직 없었지만 패턴은 먼저 뜰 수 있었다. 어차피 원단을 사 놓고 나서 망설이기 시작하면 하루가 그냥 날아갈 테니까.
박 여사에게 나무 자를 빌리고 연필을 깎은 다음, 딸의 치수를 갱지 귀퉁이에 옮겨 적었다.
'어깨 37, 가슴 82. 앞판은 4분의 1에 여유 2.'
어깨선과 진동, 옆선이 차례로 나갔고, 둥근 깃은 컴퍼스가 없으니 실 끝에 연필을 묶어 돌려 그렸다.
혜령은 문지방에 턱을 괴고 엎드린 채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바가지 언니 뭐 그려?"
"옷."
"옷을 왜 종이에 그려?"
"종이에 먼저 그려야 천을 안 버려."
혜령은 갱지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집어 올려 천처럼 비벼 보더니, 코를 찡그리며 놓았다.
"천은 비싸니까."
해주가 구겨진 귀퉁이를 펴 주는 동안에도 혜령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문지방에서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주는 연필을 쥔 채 잠깐 손을 쉬었다. 2026년이었으면 CAD 화면에서 클릭 몇 번이면 끝났을 일이다. 물론 여기선 선 하나를 그을 때마다 숨을 참아야 했다.
'틀리면 지우개. 지우개도 박 여사 거.'
지우개 가루가 장판 틈에 끼자 해주는 손톱으로 그것까지 긁어모았고, 혜령은 그 가루를 제 손바닥에 받아 갔다.
앞판, 뒤판, 소매 둘, 깃, 치마 앞뒤까지 패턴 조각이 하나씩 잘려 나오자, 해주는 장판 위에 폭 150짜리 직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조각들을 이리저리 앉혀 보았다.
▣ 요척 메모 — 상견례 투피스 광폭 150 / 3마(약 270cm) 소매 두 장 → 몸판 옆 깃·안단 → 치마 자락 사이 자투리
'딱 맞다. 남는 건 손바닥 두 개만큼.'
솔직히 이 정도면 회사에서 뽑던 마커 효율에도 꿀릴 게 없는 배치였다.
그때 박 여사가 부엌 쪽에서 고개를 들이밀었고, 그 눈이 장판 위에 흩어진 종이 조각들에 가 멎었다.
쯧.
혀를 찬 박 여사는 어깨에 걸친 행주를 내려 문지방의 연필 가루를 쓸어 내고는, 별말 없이 부엌으로 돌아갔다.

저녁 일곱 시, 광장시장. 말자는 라 레느 일이 끝나자마자 앞치마도 벗지 않은 채 달려왔다.
파장 무렵이라 시장 안쪽은 좌판마다 덮개가 덮이고 빈 함지박이 포개지는 중이었다.
「변가 상회」
그 간판 아래에서 셔터를 반쯤 내리던 변 사장이 둘을 알아보았다.
"어, 공 양. 어제 그 아가씨도."
셔터 손잡이를 쥔 채로 변 사장이 해주를 훑었다.
"아가씨는 어디 사람이야? 말씨가 서울은 서울인데, 서울 같지가 않아."
"……강원도요. 원주."
"원주. 거 먼 데서 왔네."
변 사장은 턱을 끄떡였지만, 눈은 어느새 해주의 운동화에 다시 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 신발이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사장님, 어제 그 순모 3마요. 안감이랑 심지, 단추, 실까지 다요."
변 사장은 셔터를 다시 올리고 두루마리를 내리더니 마 자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어제 쓰던 자가 아니었다. 눈금 끝이 새것처럼 각져 있었다.
'자를 바꿨다. 하룻밤 만에.'
새 자로 다시 잰 순모 위로 가위가 지나갔다.
서걱.
해주는 선금 봉투를 계산대에 올리고, 모자라는 만큼은 말자의 월급봉투를 봉투째 옆에 놓아 채웠다. 백열등 아래서 봉투 겉면의 도장이 유난히 선명했다.
변 사장은 그 봉투를 집어 들어 도장을 들여다봤다. 라 레느 경리의 도장이었다.
변 사장의 눈이 말자에게서 해주에게로, 다시 말자에게로 옮겨 가더니 한참을 머물렀다.
"공 양."
"네."
"공 양 월급봉투로 손님 원단을 사?"
말자는 웃지도 않고 앞치마 끈만 고쳐 맸다. 변 사장은 혀로 이를 훑더니 주판을 끌어당겼다.
차르륵.
주판알 하나가 위로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천 원 빼."
"네?"
"공 양 얼굴 봐서야. 손님 얼굴 말고."
변 사장이 종이에 연필로 갈겨쓴 영수증은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 변가 상회 — 영수 순모 광폭 감색 3마 5만 7천 / 안감·심지·단추·실 6,500 합 6만 3,500 → 6만 2,500(1천 원 뺌) 공 양 손님
거스름돈을 세는 말자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남는 돈 4천. 말자 씨 이번 달 생활비.'
결국 해주의 원단 값을 말자의 한 달이 메운 셈이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해주가 고개를 숙이자 변 사장은 순모를 보자기에 싸서 매듭을 두 번 지어 주었다.

"공 양, 원장님한테는 말 안 했다. 알지?"
"……네, 사장님."
가게를 나서면서 말자는 남은 지폐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끌어올렸다.
"4천 원이면요, 짜장면이 열한 그릇이에요."
"말자 씨 한 달 밥값이에요."
"박 여사님 집에 살면 밥은 나와요. 집안일만 하면."
"그럼 반찬값."
"반찬도 나와요."
"그럼 그 4천 원은요?"
"언니 연필값이요. 지우개도 사고."
말자가 웃는 바람에 해주도 따라 웃을 뻔했다. 말자 품에 안긴 원단 보자기가 걸음마다 묵직하게 흔들렸다.
'나흘 남았다. 이제 가위만 대면 된다.'
그새 골목은 어두워져서 노점마다 백열등이 하나씩 켜져 있었고, 사람들은 줄지어 큰길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말자가 보자기를 품에 안고 해주가 안감 봉지를 든 채, 둘은 골목 입구로 향했다.
골목 입구에 줄이 서 있었다.
해주는 처음엔 버스 줄인 줄 알았다. 이 시간에 사람들이 줄을 설 데라곤 정류장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앞에 선 사람들이 하나씩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지갑을 꺼내 그 안에서 작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말자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고, 보자기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해주 눈에도 보였다.
"언니."
말자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속삭였다.
"증 있어요?"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작게.
말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더니 고개가 골목 뒤쪽으로 돌아갔지만, 돌아갈 길은 이미 뒷사람들로 막혀 있었다.
줄 맨 앞에서는 군복 둘이 사람들을 세우고 있었는데, 하나는 총을 멨고 하나는 손전등을 들어 카드와 얼굴을 번갈아 비췄다.
"어디 갑니까."
"집에 갑니다. 종로요."
"가십시오."
한 사람이 지나가자 다음 사람이 앞으로 나갔다.
해주는 목에 건 줄자를 풀어 손바닥에 감았다. 손가락 사이로 눈금이 파고들 만큼 세게.
'카드가 없다. 아니, 있다. 장판 밑에.'
변 사장은 셔터를 내리다 말고 가게 문간에 나와, 이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줄이 줄어서 이제 해주 앞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앞사람이 카드를 내밀자 손전등 든 하사는 불빛을 슥 비추고 돌려주었는데, 이번에는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딸깍.
손전등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건전지가 다 됐는지 누렇게 떨리는 불빛에, 하사가 손전등 머리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쳤다.
말자는 해주의 소매를 쥐었다 놓았다가, 놓았다가 다시 쥐었다.
해주 차례였다.
하사는 스물을 갓 넘겨 보였다. 군모 아래 얼굴은 아직 앳됐다. 그 손전등 불빛이 해주의 운동화에 닿더니 통 넓은 바지와 검정 셔츠를 타고 올라와 목에서 멈췄다.
해주의 손에 감긴 줄자 끝이 늘어져 있자, 하사가 손끝으로 그 끝을 들어 올려 불빛을 댔다.
닳은 알파벳 로고가 불빛에 비쳤다.
"외제요?"
해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외제냐고. 회사 기념품이라고. 2019년에 받은.'
하사가 줄자를 놓자, 줄자가 해주의 가슴께에서 흔들렸다.
"주민등록증 좀 봅시다."
그때 골목 끝에서 소란이 일었고, 해주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군복 둘이 한 남자의 양팔을 낀 채 큰길 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뒷모습뿐인 그 남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는데, 아무도 그 신발을 줍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고, 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으로 당겨졌다.
'없다. 이 시대에 나는 번호가 없다.'
장판 밑에 넣어 둔 지갑이 떠올랐다. 사원증에 카드 세 장, 거기엔 숫자가 잔뜩 적혀 있었다. 다만 전부 46년 뒤의 숫자였다.
'들고 왔으면 더 끝이었다.'
하사는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손을 내밀고 기다렸다.
해주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해주의 팔꿈치 옆을 보자기 매듭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말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있었다.
말자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제 카드를 꺼내 하사의 손바닥에 올리고, 해주의 팔에 자기 팔을 걸었다.
목소리가 또렷했다. 사투리가 한 점도 없었다.
"우리 언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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