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등본
「등본 발급」
이불 속에서 검색창에 쳐 넣은 글자였다. 휴대폰 불빛이 이불 안을 파랗게 밝혔다.
나흘 뒤 이 종이를 받을 사람은 원스텝애드 경영지원팀의 누군가일 것이다. 재경은 합격 문자를 다섯 번째로 읽었다. 3월 3일 오전 9시. 주민등록등본 1부, 통장 사본 1부.
미룰 이유가 없었다. 미루면 나흘 내내 이 줄을 생각할 것이다.
재경은 이불을 걷었다.
오전 열 시, 주민센터 가는 길.
2월 끝자락 바람이 뒷목으로 곧장 들어왔다. 지난주까지 머리카락이 막아 주던 자리였다. 재경은 후드를 올렸다가, 도로 내렸다. 앞으로는 이 목으로 살아야 한다.
주민센터 대기 의자는 번호표를 쥔 노인들 차지였다. 벽 쪽 무인발급기 앞만 비어 있었다.
재경은 화면에서 주민등록표 등본을 골랐다. 지문 인식창에 엄지를 댔다. 기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질문 하나를 띄웠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표시」
「[표시] [미표시]」
손가락이 [미표시] 위에서 멈췄다.
미표시를 누르면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가린 번호는 한 번 더 묻게 만들고, 그러면 모르는 사람 앞에서 뒷자리 첫 숫자부터 입으로 불러 줘야 한다.
옆 발급기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이거 왜 안 나와?"
"손가락을 좀 더 꾹 누르세요, 어르신!"
창구 쪽에서 직원이 소리쳤다. 할아버지가 엄지를 다시 댔다. 기계가 삑 하고 종이를 뱉었다. 할아버지는 종이를 들고 흡족한 얼굴로 나갔다. 저 종이에도 번호가 있다. 할아버지는 그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겠지.
입으로 말하느니, 종이가 말하게 두는 편이 낫다.
재경은 [표시]를 눌렀다.
미리보기 화면이 떴다. 성명, 주소, 세대주와의 관계. 그리고 번호 칸. 눈이 뒷자리 첫 숫자로 먼저 갔다.
2.
스물여덟 해 동안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숫자.
출력구에서 종이가 밀려 나왔다. 재경은 그걸 읽지 않았다. 반으로 접어 후드티 주머니에 넣었다. 종이가 아직 따뜻했다.

다음은 주민센터 앞 편의점 복사기. 통장을 펼치자 직원이 계산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한 장이세요?"
"두 장이요."
한 장은 내고, 한 장은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 옆 문구점에서는 누런 서류 봉투 한 장과 네임펜을 샀다.
편의점 파라솔 탁자에 봉투를 눕히고 펜 뚜껑을 뺐다.
「입사서류 · 」
박, 재, 경. 석 자를 쓰고 펜이 멈췄다. 제 이름을 이렇게 천천히 써 본 게 언제였더라. 이력서에서도, 등본에서도 이 석 자는 그대로였다. 바뀐 건 머리 길이뿐이다.
그 아래를 마저 채웠다.
「입사서류 · 박재경 / 주민등록등본 1부 · 통장 사본 1부」
오후 세 시, 자취방.
문을 열자 윤하나가 롱패딩 지퍼를 턱까지 올리고 서 있었다. 나이트 끝나고 몇 시간 못 잔 얼굴이었다.
하나는 신발도 벗기 전에 방을 훑었다. 행거의 남색 정장. 옷걸이 목에 감긴 넥타이. 바닥의 뜯긴 택배 상자. 그리고 재경의 머리.
"……와."
"뭐."
"진짜 잘랐네."
"자르라며."
"자르라고 했지, 이렇게 잘 어울리라고는 안 했어."
하나가 재경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뒤통수 예쁘게 해 놨네. 미용실 어디야?"
"학교 앞."
하나가 그제야 운동화를 벗었다. 비닐봉지에서 컵라면 두 개가 나왔다.
"합격 문자 보고 탈의실에서 소리 질렀잖아. 수간호사 선생님이 뛰어왔어."
"뭐라고 했는데."
"친구가 취직했다고 했지. 뭐라고 해."
하나가 택배 상자 송장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재경은 상자를 발로 밀어 침대 밑에 넣었다.
"어머니한텐?"
"붙었다고만 했어. 전화로."
"머리는?"
"……안 물어보셨어. 전화였으니까."
하나가 입을 삐죽였다. 재경은 더 보태지 않았다.
"근데 경영지원이면 뭐 하는 거야?"
"회계, 총무, 인사. 급여랑 4대보험까지."
"그럼 네 월급 네가 주는 거야?"
"회사가 주는 거지."
"네 손으로."
재경은 대답 대신 하나가 벗어 던진 롱패딩을 주워 옷걸이에 걸었다.
"합격 축하. 이게 저녁이야. 일단 입어 봐."
재경은 화장실에서 셔츠와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단추는 목 끝까지 채웠다. 벽의 전신거울에는 빨아 넌 수건이 걸려 있었다. 재경이 수건 끝을 잡자 하나가 손등을 탁 쳤다.
"거울 보지 마."
"왜."
"거울은 네 편이라 안 돼. 남이 보는 건 내가 봐 줄게."
하나가 현관에 등을 붙이고 섰다.
"걸어 봐. 여기서 창문까지."
다섯 걸음. 재경은 걸었다.
"스톱. 너 지금 오른팔이랑 오른발이 같이 나갔어."
"안 나갔어."
"나갔어. 다시."
다시 걸었다. 이번엔 팔을 아예 안 흔들었다.
"네가 무슨 결재판 들고 다니는 사람이야?"
"들고 다닐 건데."
"들고 다녀도 흔들어. 발끝은 살짝 바깥. 그리고 가방은 두 어깨 다 메. 한쪽으로 메면 멋 부리는 거 같아."
"멋 부리면 안 돼?"
"첫날엔 안 돼."
다섯 걸음을 열 번 왕복했다. 열한 번째에야 하나가 손을 들었다. 됐다는 뜻.
의자에 앉자 무릎이 저절로 붙었다. 재경은 붙은 무릎을 내려다보다 어깨너비로 벌렸다. 두 손은 허벅지 위에.
"오. 그건 할 줄 아네?"
"어제 배웠어. 옆 사람한테."
"다리 꼬는 건? 남자들은 발목을 무릎에 올리더라."
재경은 오른 발목을 왼 무릎에 올려 보려 했다. 새 바지가 허벅지에서 팽팽하게 버텼다. 발목이 무릎 근처에서 내려왔다.
"……이건 못 하겠어."
"그럼 꼬지 마. 안 꼬는 남자도 많아."
하나가 휴대폰 타이머를 켰다.
"넥타이. 풀고 다시 매. 타이머 잰다."
첫 번째는 52초가 걸렸다. 두 번째는 매듭이 옆으로 누웠다. 하나가 손가락으로 매듭을 가리키기만 했다. 재경이 다시 풀었다.
세 번째. 손이 영상 속 순서를 기억했다. 하나가 숫자를 소리 내어 셌다.
"스물여섯, 스물일곱……."
매듭이 목까지 올라갔다.
"스물여덟."
삐—
타이머가 뒤늦게 울렸다.
"……초보도 30초 완성."
"뭐?"
"영상 제목."
"인사해 봐."
"안녕하십니까. 박재경입니다."
"너무 깔았어. 성우냐?"
"안녕하십니까. 박재경입니다."
"어. 그 정도. 평소엔 괜찮네."
하나가 뭔가 덧붙이려다 입을 닫았다. 대신 의자를 끌어와 재경 앞에 앉았다. 옆자리 직원 흉내였다.
"신입이에요? 몇 살?"
"스물여덟입니다."
"고향은?"
"청주입니다."
"취미는?"
"……엑셀입니다."
하나가 흉내를 잠깐 멈췄다.
"그건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너라서 이상한 거야. 운동이라고 해. 아무 운동."
"운동합니다."
"무슨 운동?"
"……아무 운동."
하나가 베개를 집어 던졌다. 재경은 한 손으로 받았다. 넥타이 매듭은 그대로였다.
"여자친구 있어요?"
"없습니다."
"왜 없어?"
"……차였습니다."
하나가 흉내를 그만두고 이마를 짚었다.
"그건 말하지 마."
"사실인데."
"사실이라고 다 말하는 거 아니야. 그냥 없다고만 해."
재경은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없다고만 하면 다음 질문은 소개해 줄까, 일 것이다. 남자로 사는 동안 연애는 없다. 그건 계산에 넣지 않았다.
하나는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 근데 오른팔 오른발은 진짜 웃겼어."
하나는 누운 채로 한참 웃었다. 재경의 입꼬리도 조금 올라갔다.

저녁 여섯 시. 전기포트 물이 끓었다.
두 사람은 방바닥에 마주 앉아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재경은 넥타이 매듭을 한 뼘 내렸다.
"회식 가면 두 병 넘기지 마. 너 세 병째부터 기억 없잖아."
"그 얘기 또 한다."
"또 할 거야. 그리고 화장실은 혼자 가."
"그건 면접 날 이미 배웠어."
"뭘 배워."
"여자 쪽으로 가다가 180도 돌았어. 칸까지 게걸음으로 갔고."
하나가 젓가락을 든 채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칸만 써. 무조건 칸."
"평생 칸만 쓰기로 했어."
"회사 화장실은 어떤데."
"층 공용. 다른 회사랑 같이 써."
"……최악이네."
"그래서 칸."
하나가 라면을 한 젓가락 먹었다. 그러고는 젓가락 끝으로 재경의 셔츠 가슴께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거. 안에 입은 거."
"……응."
"이건 진짜 직업적으로 하는 말이야. 하루 여덟 시간 넘기지 마. 잘 때는 무조건 벗고. 오래 조이면 숨이 얕아져."
"여덟 시간."
"아침에 입고 나가면 저녁 먹기 전엔 벗어야 된다는 거야."
"야근하면?"
"야근을 하지 마."
"경영지원 신입한테 그게 돼?"
"그럼 화장실 가서 잠깐이라도 풀어. 숨 쉬라고."
재경은 라면 국물을 내려다봤다. 아홉 시 출근, 여섯 시 퇴근. 앞뒤로 지하철 한 시간씩. 셈이 맞지 않았다.
하나가 컵라면 뚜껑을 덮었다. 아직 반도 안 먹은 라면이었다.
"누가 물으면? 남자냐고."
"그렇게 묻는 사람은 없어."
"물으면."
재경은 젓가락을 내려놨다.
"……대답 안 해."
"그게 되냐."
재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가 재경을 한참 봤다.
"그게 거짓말이야, 박재경."
이번엔 반박하지 않았다. 재경도 제 라면 뚜껑을 덮었다.
방 안에 전기포트 식는 소리만 났다. 먼저 뚜껑을 연 건 하나였다.
"먹어. 불어."
재경도 뚜껑을 열었다. 면이 국물을 다 먹고 부풀어 있었다.
"첫 출근 끝나면 연락해. 바로."
"응."
"사실만 말고. 어땠는지도."
"……응."
밤 열한 시. 하나는 두 시간 전에 돌아갔다. 집에 닿자마자 메시지가 왔다.
[하나] 도착
[하나] 여덟 시간. 잊지 마
[나] 알아
[하나] 알면 됐어 신입
재경은 휴대폰을 엎어 두었다.
책상 스탠드 아래에 누런 봉투. 재경은 후드티 주머니에서 접힌 등본을 꺼냈다. 펴지는 않았다. 통장 사본과 겹쳐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흘 뒤 이 봉투를 받을 사람은 누굴까.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합격 문자 끝의 이름 석 자만 잠깐 떠올랐다가 흐려졌다.
필통에서 딱풀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하얀 풀 끝이 쏙.
재경은 뚜껑을 다시 닫았다.
붙이면 숨기는 것 같았다.
입구를 한 번 접기만 했다. 행거에는 남색 정장. 스탠드 빛을 받아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다. 나흘 뒤 저걸 입고, 이걸 들고 간다.
봉투 입구는 풀칠하지 않았다. 나흘 뒤 이걸 누가 열든, 그 사람 앞에서 박재경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으면.
▣ 박재경 · 경영지원팀 │ 입사 D-4 · 들킬 뻔 1 (+1: 화장실) · 거짓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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