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열여덟 번
통화 종료를 누르자마자 다시 걸었다.
신호가 네 번 가고 기계음이 끼어들더니,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진아, 나야."
숨을 쉬는 자리도 같았고, "놀라지 말고" 앞에서 반 박자 쉬는 것까지 똑같았다. 녹음이었다.
심지어 목소리는 평소 그대로라 서두르지도 떨리지도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다시 걸어 보았지만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다 듣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문은 네가 나한테 처음으로 이긴 날이야.
무슨 문인지도, 내가 처음으로 이긴 날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모르는 것이 두 개인 셈이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우리 청 사람한테는 특히.
대기실 문을 조금 열자 복도 너머로 빈소가 보였다. 어차피 거기 앉은 검은 양복의 절반은 지검 사람이었다.
문을 닫으려는 참에 복도 끝에서 현주가 걸어왔다.
"언니, 안에 있었어요? 차장님이 찾으세요. 조문객 많이 오셨어요."
"금방 갈게요."
현주의 눈이 문틈으로 대기실 안을 훑었다. 소파 위의 핸드백과 내 손에 들린 휴대폰까지.
"언니, 무슨 일 있어요?"
"없어요."
현주가 더 묻지 않고 돌아가자, 나는 문을 닫고 통화 기록을 열었다. 같은 번호가 세 줄. 13:52, 13:53, 13:54. 세 번 모두 통화 시간까지 찍힌 걸 보면, 적어도 헛것을 들은 건 아닌 셈이다.
메모를 두 번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핸드백 지퍼는 끝까지 잠갔다.
오후 내내 나는 조문객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누가 청 사람이고 누가 아닌지를 가리는 일이었다.
남편을 부르는 말은 현우와 도 검사로 갈렸는데, 도 검사라고 부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사모님, 저 기억하세요? 도 검사님 방에 있던 실무관입니다."
"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같은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15:00. 빈소.
조문객이 한꺼번에 일어서는 바람에 고개를 돌려 보니, 입구에 흰머리의 남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한강지검 검사장 조항석이었다. 신문 사진으로 몇 차례 본 얼굴이었고, 배병조 차장이 먼저 나가 허리를 굽혔다.
"검사장님, 바쁘실 텐데 오셨습니까."
"도 검사 일인데 와야지."
"도 검사 부인입니다. 문서진 변호사님이십니다."
검사장은 향을 올리고 절을 마친 뒤 내 앞으로 왔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도 검사는 아까운 사람이었어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호사시라고요. 도 검사한테 들었습니다. 부인이 법정에서 무섭다고."
남편이 밖에서 나를 두고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그날 처음 들었다.
내가 허리를 숙이자 검사장은 돌아서서 배병조 옆을 지나가며 목소리를 낮췄다.
"정리는 잘 됐고?"
"네."
배병조의 대답은 짧았고, 검사장은 수행원을 데리고 그대로 나갔다.
화장 예약, 부검 없는 종결, 조문객 명단까지 장례에는 정리할 것이 많다. 적어도 그때 나는 그 말을 그렇게 알아들었던 것이다.
배웅을 마친 배병조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
"검사장님께서 제수씨 따로 챙기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지금은 없습니다."
"생기시면요."
18:10.
회색 양복을 입은 쉰 중반쯤의 남자가 혼자 들어왔다.
남자는 방명록에 제 이름 대신 회사 이름을 적었다. 청운물류, 반듯한 글씨였다.
부의함에 밀어 넣은 흰 봉투가 두꺼워서 입구에 걸리자, 그는 손바닥으로 봉투를 꾹 눌러 넣었다.
"회사 차원에서 조의를 표합니다."
"고인과는 어떻게 아시는지요."
"회사 차원에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회사 차원이라는 말만 되풀이한 그는 절을 마치자마자 곧장 나갔다.
회사 이름으로 서명하는 조문객은 드문 법이다. 남편이 그 회사와 무슨 일로 엮였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남자는 입구를 지키던 배병조 앞을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갔다. 배병조 역시 남자 쪽은 보지도 않고 다른 조문객을 맞았다.
저녁 여덟 시, 접객실.
시어머니는 국그릇을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 생각을 하지 않아서, 현주가 수저를 손에 쥐여 드렸다. 시어머니는 수저를 쥔 채로 그대로였다.
"목요일에 우리 현우가 반찬 가지러 왔었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한 통 가득 싸 줬어. 그걸 다 먹지도 못하고."
"엄마, 좀 드세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
현주가 어머니의 등을 쓸어내리는 동안, 나는 무슨 목요일인지 묻지 않고 넘어갔다. 시어머니는 그 말만 하고 국그릇으로 고개를 떨궜다.
"서진아, 너도 먹어라."
"먹을게요, 어머님."
숟가락을 들고 보니 국은 이미 식어 있었다. 현주가 내 그릇을 들고 가서 뜨거운 국으로 바꿔 왔다.
밤 열한 시가 되자 조문객이 거의 빠져, 빈소에는 나와 장례지도사와 향 연기만 남았다.
그때 모자를 눌러쓴 젊은 여자가 검은 점퍼 차림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절은 하지 않고 향 한 대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는데, 손이 빨랐다. 향을 쥔 손가락은 가늘었고 손톱은 짧았다.
"저기요."
일어서려고 무릎을 세웠을 때 여자는 벌써 등을 보이고 있었고, 모자챙이 얼굴을 가렸다.
"잠깐만요."
여자는 복도 쪽으로 걸음만 빨리했다. 결국 얼굴은 보지 못했다.
"누구시죠?"
지도사에게 물었더니, 지도사는 새로 꽂힌 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뵙는 분입니다."
복도로 나가 보았지만 복도는 텅 비었고, 계단 쪽 방화문만 천천히 닫히는 중이었다.
빈소로 돌아오니 향로에서 향 한 대가 다른 향들보다 길게 솟아 있었다. 방금 꽂은 향이었다.
자정이 넘어서 배병조가 넥타이를 반 뼘쯤 느슨하게 푼 채 다시 왔다.
"제수씨, 대기실에 들어가서 눈 좀 붙이세요. 제가 지키겠습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그럼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그는 내 뒤쪽 벽에 기대앉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현우를 처음 본 게 연수원 강의실이었습니다. 맨 앞줄에서 질문만 하던 놈이었죠."
"그랬을 겁니다."
"수업 끝나고도 따라 나와서 묻더라고요. 그때부터 귀찮은 놈이었습니다."
그러다 그가 불쑥 물었다.
"제수씨, 현우가 요즘 집에서 무슨 얘기 안 하던가요?"
"일 얘기는 집에서 안 했습니다."
"그렇죠. 두 분은 같은 사건 안 맡는다고 했으니까."
"네. 그게 저희 원칙이었습니다."
"현우다운 원칙입니다."
재킷 안주머니 위에 손을 얹자 종이 한 장의 두께가 손바닥에 걸렸다.
오늘 들은 목소리를 누구에게 말할지 따져 보았다. 시어머니, 현주, 배병조.
현주는 남편의 동생이고 청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남편은 분명히 아무한테도, 라고 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남편이 그렇게 말했으니 따르기로 했다.
새벽 내내 향을 세었다. 40분에 한 대씩이었는데, 지도사는 시계를 보는 법도 없이 때맞춰 새 향을 꽂았다.
배병조는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지만, 잠든 얼굴은 아니었다.
다섯 시 반에 지도사가 제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정부터 세어 아홉 대째 향이었다.
06:20.
"상주님, 이제 닫겠습니다."
지도사가 제단의 촛불을 하나씩 끄다가, 흰 장갑 낀 손이 향로 위에서 멎었다.
고개를 든 지도사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틀 동안 없던 일이었다.
그러고도 지도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눈이 마주친 그대로 향로를 들어 올렸다.

"제수씨, 영정은 제가 들까요?"
"제가 들겠습니다."
나는 영정을 가슴에 안았다. 운구는 지검 직원 여섯이 맡았고, 배병조가 맨 앞에서 복도 문을 잡아 주었다.
"발인하겠습니다."
지도사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시어머니는 현주에게 기대 걸었는데, 관이 문턱을 넘을 때 짧게 소리를 냈다.
"엄마, 나 여기 있어. 나 붙잡고 걸어."
현주가 어머니의 어깨를 더 세게 붙들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본 것인지 빈소를 본 것인지는 모르겠다.
복도 창밖은 막 밝아 오는 중이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화장장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운구차 안으로, 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관이 밀려 들어갔다.
영정을 안고 뒷좌석 문 앞에 섰을 때 운구차 뒷문이 닫혔다. 쿵, 하는 소리였다.
끝났다.
07:00.
눈을 떠 보니 유족 대기실 소파였다. 휴대폰 화면에는 9월 24일 토요일 07:00.
알림이 일곱 개였다. 부고를 늦게 본 사람들의 문자가 같은 순서로 올라와 있었는데, 전부 어제 아침에 읽은 문자들이었다.
재킷 안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핸드백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메모가 거기 있었다. 접힌 그대로였다.
07:40.
상식이 끝나자 방명록 받침대 앞으로 갔다. 줄에 묶인 펜이 받침대 다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첫 장을 펴자 김 계장의 이름이 맨 위에 있었고, 그 아래로 지검 직원들과 남편의 대학 동기가 이어졌다.
한 장을 넘겨도 김 계장, 지검 직원들, 대학 동기였다.
김 계장 이름의 마지막 획은 옆 칸으로 삐져나갔는데, 쪽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실수였다.
한 장 더 넘겼다. 같은 이름이 같은 순서로 적혀 있었고, 쪽마다 끝 무렵에는 반듯한 글씨로 청운물류가 있었다.
몇 쪽은 이름이 한두 줄 더 있었는데, 12쪽에서 손가락이 잠깐 멎었다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동안 나는 쪽수를 세었다.
18쪽 끝 무렵에도 청운물류가 있었다. 어제 저녁에 본 바로 그 글씨였다.
1쪽으로 돌아가 보니 1쪽에도 청운물류가 있었다. 그 남자가 열여덟 번이나 같은 봉투를 넣고 같은 말을 했다는 뜻이다.
조항석이라는 이름도 쪽마다 같은 자리, 세 시 정각의 자리에 놓였다.
19쪽을 펴자 줄만 그어진 흰 종이가 나왔다. 아무 이름도 없었다.
줄에 묶인 펜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무엇을 적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명록에서 손을 떼고 받침대 모서리를 잡았다. 설마 싶어 처음으로 돌아가 천천히 다시 세었다.
열여덟.
그런데 열여덟 쪽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쪽은 하나뿐이다.

"상주님, 조문객 들어오시기 전에 자리에 앉으시지요."
뒤에서 지도사가 말했지만, 나는 방명록을 펼쳐 둔 채로 자리에 돌아갔다.
"언니, 얼굴이 왜 그래요?"
현주의 물음에 나는 무릎 위에 손을 포개는 것으로 답을 미뤘다. 현주는 한동안 나를 지켜보다가 신발 정리를 하러 갔다.
8시 40분, 배병조가 왔다.
어제와 같은 시각이었다. 영정 앞에 향을 올리고 두 번 절한 뒤, 시어머니에게 가서 허리를 굽혔다.
"어머님, 잠깐이라도 누우셔야 합니다. 제가 여기 있겠습니다."
어제와 같은 말이었고, 시어머니의 대답도 같았다.
"아이고, 차장님이 고생이 많으시네."
나는 종이컵을 기다렸다.
그런데 종이컵은 오지 않았다. 그는 빈손으로 와서 내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어제보다 한 뼘 가까운 자리였다. 향로 쪽에 눈을 둔 채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제수씨, 이번이 몇 번째입니까?"
열여덟 번째 장례식 방명록 — 같은 이름이 열여덟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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