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문
10:20. 빈소.
신발 정리를 하다 온 현주가 먼지 묻은 손을 털지도 않고 내 옆 방석에 앉았다.
"언니."
영정 쪽에 눈을 둔 채 꺼낸 목소리가 작았다.
"언니… 이번엔 언니도야?"
나는 고개를 돌렸지만 현주는 내 쪽으로 눈을 주지 않고, 팔에 찬 완장만 매만져 고쳐 찼다.
"아침에 방명록 앞에 오래 서 있었잖아요. 차장님이랑 접객실도 가고. 언니가 어제는 안 하던 거예요."
매번 같은 말을 하던 사람이 다른 말을 하면 안다던 배병조 차장의 말 그대로였다.
"아가씨도 기억해요?"
"네."
"언제부터요?"
"여섯 번째쯤. 아마."
"아마요?"
"번호는 자신 없어요. 세다 보면 모자라요."
현주는 팔짱을 꼈을 뿐, 무엇이 모자라는지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방명록에 점 찍는 사람, 아가씨도예요?"
"나도 찍어요. 기억나는 날엔."
그 말을 하면서 현주의 눈이 입구 쪽 방명록으로 건너갔다.
기억나는 날엔. 나는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지만 수첩에 적지는 않았다.
"차장님이 언니한테 뭐래요?"
"밖에 나가지 말라고요. 나가면 오늘이 지워진다고."
"그건 맞아요. 나한테도 그랬어요. 흡연 구역 넘어가지 말라고."
"또 뭐라고 했어요?"
"그게 다예요. 차장님은 원래 말을 아껴요."
현주가 잠깐 머뭇거렸다.
"언니, 차장님한테 다 말했어요?"
"무엇을요?"
"아니에요. 그냥."
팔짱을 푼 현주가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물었다.
"언니는 언제부터예요?"
"어제부터요."
현주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아가씨는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현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되묻는 건 내 버릇이고, 현주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됐어요. 언니는 원래 나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보잖아요. 대답도 안 하고."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는 무릎 위에 손을 포갰다.
"여섯 번째에는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건…… 나중에."
현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건물에서 나중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현주도 알 텐데.
입구에서 발소리가 나자 현주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 갔다.
긴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막 들어서는 참이었다. 마흔 무렵에 짧은 머리, 안경을 쓴 얼굴이었다.
"저 여자."
현주가 낮게 말했다.
"저 여자도 기억하는 사람이에요."
방명록 앞에서 펜을 든 여자가 또박또박 이름을 적었다. 한유경.
서명을 마친 여자는 향을 올리고, 절을 하기 전에 어깨에 멘 가방을 방석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현주가 일어섰다. 소리 없이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가더니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현주의 손가락이 지퍼 손잡이에 닿는 순간, 절을 마치고 일어서던 여자가 몸을 틀어 현주의 손목을 낚아챘다.
"뭘 찾으시는데요?"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빈소에 있던 몇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숙였다.
"아니, 그게."
현주가 손을 빼려 했지만 여자는 놓아주지 않았다.
"유족분이시죠. 완장 보고 알았어요. 찾으시는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열어 보지 마시고요."
"……죄송합니다."
여자가 손을 놓자 현주는 손목을 문지르며 입구 쪽으로 물러났고, 여자는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멨다.

그러고는 내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었다.
"변호사님."
조문객 대부분은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으니,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드문 편이었다.
"저를 아십니까."
"도 검사님께 들었습니다."
남편은 이 사람에게 내 얘기를 했는데, 정작 나는 이 사람의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남편과는 어떤 사이세요."
여자는 안경을 벗더니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렌즈를 닦았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확인된 것만 말씀드리는 게 제 원칙이라서요."
"그럼 확인된 것을 말씀해 주세요."
여자가 안경을 다시 썼다.
"저도 기억합니다. 이 하루를요."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네 번째하고 열두 번째요."
"번호를 어떻게 아십니까."
"점을 찍을 때마다 쪽수를 봤으니까요. 적어 두는 게 버릇이라서요."
기억에 번호가 없다던 배병조의 말이 떠올랐다. 적어도 이 사람은 번호를 적어 둔 사람이다.
"무엇을 기억하십니까. 그 두 날에."
"그건 아직 확인된 게 아니라서요."
"확인이 되면요."
"그때는 제가 먼저 찾아뵙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여자가 코트 자락을 가볍게 털었다.
"변호사님도 기억하시게 됐으니, 또 뵙겠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말투가 한결같았고,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여자는 가방을 어깨에 멘 채 빈소를 나갔다. 입구의 현주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좇다가 내 옆으로 돌아왔다.
"봤지? 저 여자 가방에 뭐 있어."
"뭐가 있는데요?"
"몰라. 그러니까 열어 보려고 한 거지."
"물어보라고 하던데요."
"물어보면 말해 줄 것 같아?"
현주가 다시 손목을 문질렀는데, 거기에는 붉은 손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나는 방명록 앞으로 가서 4쪽을 폈다. 점이 둘이었고, 12쪽에도 점이 둘이었다.
두 쪽 모두 같은 자리에 한유경이라는 서명이 있었다. 1쪽에도, 18쪽에도 있었으니 그 사람은 매번 이 시각에 왔던 셈이다.
열한 시 입관도 같은 순서, 같은 손으로 진행됐다. 장례지도사의 손은 이번에도 남편의 오른손 위에서 반 박자 멎었고, 현주는 남편의 손보다 조금 위, 소매 쪽을 오래 응시했다.
11:30. 접객실.
입관을 마치고 접객실로 나오자, 어깨가 조금 남는 검은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일어섰다.
"사모님. 윤재민입니다. 검사님 모시던……."
남편과 5년을 같이 일한 수사관이었다. 집들이 때 인사를 나눈 기억이 나는 얼굴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사관님."
"아닙니다. 그게, 그게…… 제가 뭐라고 드릴 말씀이."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식탁 모서리로, 다시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현주는 여섯 번째쯤부터라고 했다. 한유경이라는 여자는 네 번째와 열두 번째, 배병조는 열 번쯤.
그리고 남편과 가장 가까이서 일한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었다.
"수사관님."
"예."
"혹시 기억하세요?"
"예? 무슨……."
되묻는 그의 시선은 내 쪽이 아니라 자기 구두코에 가 있었다.
"어제 일이요."
"어제요?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뒷목을 문질렀다.
"검사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수사관님 잘못이 아닙니다."
"예. 예."
그는 대답할 때마다 고개부터 숙였다.
"남편이 마지막 주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그게…… 저는 수사관이라서요. 검사님 일정은 검사님이 정하셨습니다만."
거듭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돌아간 윤 수사관은, 육개장 그릇 앞에 앉아서도 숟가락을 들지 않고 양복 주머니 위에 손만 얹고 있었다.
게다가 남편의 이름은 끝까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검사님, 검사님이었다.
그때 배병조가 접객실로 들어와 윤 수사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윤 수사관, 밥은 먹었나."
"예, 차장님."
하지만 육개장은 손도 대지 않은 그대로였고, 식은 기름이 국물 위에 얇게 굳었다. 배병조는 그걸 보고도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 시에는 강 경위가 같은 서류를 같은 목소리로 읽었다. 0.13퍼센트, 휴대폰 한 대, 지갑, 차 키.
14:00. 유족 대기실.
문을 닫고 잠금 단추를 누른 뒤, 소파에 앉아 재킷 안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냈다.
네가 들어야 할 얘기는 여기 두고 갈게.
여기. 남편은 인사말 안에서 분명 여기라고 했다. 번호 너머 어딘가, 녹음을 남긴 곳 말이다.
변호사 일을 하면서 음성사서함 녹음을 증거로 다뤄 본 적이 있어서, 인사말이 나오는 동안 별표를 누르면 주인 확인 단계로 넘어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주인만 들어갈 수 있는 방에 남편이 무언가를 두고 간 것이다.
번호를 누르자 신호가 네 번 가고 기계음이 나더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진아, 나야."
별표를 누르자 목소리가 뚝 끊겼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여자 목소리의 안내 음성이 요구하는 건 네 자리였다.
남편의 생일, 내 생일, 결혼기념일. 처음으로 이긴 날은 아직 모르니, 둘이 함께 아는 날부터 넣어 보기로 했다.
결혼기념일. 5월 27일.
0, 5, 2, 7. 우물 정 자.
"비밀번호 오류 횟수를 초과하여 오늘은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 화면에는 통화 시간 38초가 찍혔다.
다시 걸어 인사말이 나오는 동안 별표를 눌렀지만, 같은 안내가 돌아왔다. 오늘은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나는 딱 한 차례 눌렀을 뿐이다. 그런데 초과라는 말은 그 전에 틀린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오늘, 내가 누르기 전에. 두 번.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고, 그 사람도 문을 열려고 하고 있다.
그 시도들은 오늘 두 시 전의 일이다. 내가 방명록 앞에 서 있을 때였을 수도, 입관실에 있을 때였을 수도 있다.
배병조에게 말하면 그는 틀림없이 도울 것이다. 그러면 그도 이 번호를 알게 된다.
우리 청 사람한테는 특히.
물론 남편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번호를 알려 줬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문을 못 여는 걸까. 비밀번호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면, 그 사람은 남편이 번호를 알려 준 사람이 아니다.
메모를 다시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는데, 단추 하나를 채우는 데 손이 자꾸 헛돌았다.
14:10. 접객실.
누군가 오늘 그 기회를 다 써 버렸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접객실 문고리를 잡으면서 그 번호를 다시 눌렀다. 사서함이 잠겼어도 인사말까지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문을 열자 육개장 냄새와 귤 냄새가 섞여 났고, 나는 신호가 가는 동안 안을 둘러보았다.
배병조는 셔츠 소매를 걷은 채 식탁 끝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윤 수사관은 한 손을 양복 주머니에 찔러 넣고 창가에 붙어 섰고, 현주는 시어머니 곁에서 귤을 까는 중이었다.
신호음이 한 차례 울렸다.
어디선가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가 멎었다.
나는 통화 종료를 눌렀다. 그래도 휴대폰을 꺼내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주는 귤껍질을 접시에 내려놓았고, 윤 수사관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언니, 귤 먹어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현주가 내민 귤 반쪽을 받아 식탁에 내려놓았다.
배병조가 주전자를 들어 빈 종이컵에 보리차를 따르더니 내 쪽으로 밀었다.
"보리차입니다. 식으면 새로 따라 드리겠습니다."
종이컵에서 그의 얼굴로 눈을 옮기는 사이, 그는 주전자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제수씨, 식사는 하셔야죠."
나는 대답 대신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윤 수사관은 여전히 창밖에 눈을 둔 채였고, 양복 주머니에 넣은 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열아홉 번째 장례식 방명록 — 누군가 나보다 먼저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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